컨텐츠 바로가기

06.02 (일)

합의 없는 이혼, 영국에 먹구름이 몰려온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브렉시트 70여일 남은 영국은… 런던=김아진 특파원 르포]

"물가 10% 폭등, 집값 30% 폭락, 유럽여행도 마음껏 못가"

미리 보는 '노딜 브렉시트' 시나리오

조선일보

런던=김아진 특파원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시한이 약 70일 앞으로 다가왔다. 영국은 지난 2016년 6월 국민투표를 통해 브렉시트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올 3월 유럽연합(EU)에서 탈퇴했어야 했다. 하지만 영국 정치권이 3년간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싸움을 이어가면서 약속 시한을 넘겼다. 그 책임으로 테리사 메이 총리가 불명예 퇴진했고, 최근 보수당의 브렉시트 강경파인 보리스 존슨 총리가 새 총리로 선출됐다. 존슨 총리는 취임 일성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10월 31일 브렉시트를 강행하겠다"고 했다. 이 때문에 유럽 안팎에서는 영국이 합의 없이 EU에서 탈퇴하는 '노딜(No deal·합의 없는) 브렉시트'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고 있다. 영국의 연구소인 IFG는 최근 브렉시트 관련 보고서를 통해 영국 의회가 더 이상 브렉시트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여당인 보수당 내 브렉시트 반대파들과 야당이 힘을 합쳐 또다시 브렉시트 시한을 연기하는 연장안을 통과시킬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영국과 EU 국민은 모두 혼란을 겪고 있다. BBC 등 영국 언론들은 노딜 브렉시트가 현실화되면 영국인들의 삶에 매우 큰 변화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장바구니 물가 폭등

영국이 EU와 아무런 합의 없이 브렉시트를 하면 가장 먼저 장바구니 물가가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매일 아침 네덜란드 등에서 아무런 통관 절차 없이 무관세로 신선한 과일과 야채 등이 영국으로 들어오고 있다. 작년 기준 영국에서 소비하는 식료품의 28%가 다른 EU 회원국으로부터 공급되고 있다. 하지만 노딜 브렉시트 시 관세가 붙어 가격이 오르는 것은 물론 복잡한 통관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운송도 지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파운드 가치까지 하락하면 가격 상승은 불 보듯 뻔하다. 영국의 세인즈버리즈(Sainsbury's) 등 대형 유통 업체들은 "항상 꽉 차 있던 마트의 선반들이 텅 빌 수 있다"며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통조림 등 일부 상품들은 재고를 축적해놨지만 신선 제품들에 대해선 어떤 대비책도 없어 비상"이라고 했다. 영국중앙은행(BOE) 총재인 마크 카니는 "최악의 경우 장바구니 비용이 10% 증가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공포 때문에 영국인들이 벌써 사재기에 나섰다. 금융업체 '프리미엄 크레디트'에 따르면 영국 국민 5명 중 1명꼴로 노딜 브렉시트에 대비해 이미 식품과 음료 등을 사들였고 이 비용이 무려 40억파운드(약 5조89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의약품도 비싸질 수 있다. 영국 내에서 팔고 있는 진통제와 항우울제 등 약은 75%가량이 EU에서 수입되고 있다. 영국 정부와 의료보험기구인 NHS는 노딜 브렉시트에 대비, 충분한 의약품과 임상 장비를 확보하기 위해 최근 4 억4400 만파운드(약 6500억원)의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뿐만 아니라 EU에서 넘어오는 의류, 잡화 등의 가격도 오를 전망이다. 현재는 같은 프랑스 브랜드 옷을 구입할 경우 이탈리아에서 사든 영국에서 사든 값이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노딜 브렉시트가 되면 수입세가 붙어 영국에서의 판매 가격이 오르게 된다.

◇부동산 폭락, 휴대전화료 상승 가능성

조선일보

BOE는 "노딜 브렉시트가 현실화되면 영국의 주택 가격이 브렉시트 이전 수준에서 최대 30%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부동산 업체인 사빌스(Savills)는 "올 상반기 런던의 주택 평균 가격이 작년 대비 32% 하락했다"며 "브렉시트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영국의 부동산 시장이 10년 전인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가장 약세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이 밖에 BBC는 "영국인이 EU에서 사용하는 휴대폰 로밍 비용이 비싸질 수 있다"고도 했다. 현재 보다폰(vodafone), 오투(O2), 스리(3) 등 이동통신사업자는 EU 전역에서 통화, 데이터 등을 로밍할 때 추가 요금을 받지 않고 있다. 하지만 영국과 EU가 아무런 합의 없이 '이혼'을 결정하면 통신망 공유 등에 대한 조건이 달라질 수 있어서 로밍 비용을 소비자가 부담해야 할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불편해지는 유럽행

조선일보

브렉시트를 강행하려는 영국 존슨 총리


그동안 영국인들과 EU인들은 어떠한 비자 발급 없이도 서로의 나라에서 공부하고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영국에서 EU 국가로, EU 국가에서 영국으로 여행 등을 위해 오갈 때 기간, 목적 등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영국에 머물고 있는 EU인은 300만명, EU 국가에 있는 영국인은 100만명이다. 하지만 노딜 브렉시트를 하면 이 같은 편리함은 모두 사라진다. 서로의 나라에서 돈을 내고 취업 비자 같은 형태로 노동 허가를 받아야만 일할 수 있게 된다. 이민 절차도 까다로워질 것으로 보인다. 영국에서 일하는 오스트리아인 쉐린씨는 "브렉시트 이후에 영주권 신청 등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영국에 있을 이유가 없다"며 "조만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영국과 다른 EU 국가 간 무비자 여행도 어렵지 않겠느냐는 전망이다. 국가 간에 따로 단기 여행 비자 면제 협정을 체결해야만 한다.

[런던=김아진 특파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