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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마지막일지 모를… 오늘도 0.05㎜ 펜촉을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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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화가 김영택]

0.05㎜ 펜촉으로 건축물 세묘한 '기록 펜화 개척자' 김영택 화백

해남 미황사에서 30일까지 전시

"대장암 치료 중단… 이곳서 치유… 매일 새벽 4시 백팔배 후 작업… 모든 건 '진인사대천명'이지요"

펜화가 김영택(74)씨가 미황사와 첫 연을 맺은 건 1997년이었다. 홀로 대웅보전 앞마당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주변에 식당 하나 없어 식사는 포기해야 할 판이었다.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공양하고 가시지요." 주지 금강 스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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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미황사 대웅보전 앞에 펜화가 김영택이 앉아있다. 옆에 펜화 '해남 달마산 미황사'(2015)가 놓여 있다. 금강 스님은 "그림 속 현장감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달마산 연봉이 오백나한이 돼 미황사를 호위하는 모습이 역력하다"고 했다. /김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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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는 전라남도 해남 땅끝에 있는 오랜 절이다. 김씨는 올해 초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았고, 지난 7월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금강 스님의 권유였다. "이미 수술은 어려운 상태고, 항암 치료도 중단했다. 마침 스님이 선뜻 방 한 칸을 내줘 작업과 치유를 병행하고 있다. 미황사 물과 공기가 나를 도와준다." 매일 새벽 4시 백팔배를 올린다. "인생 어느 시점엔가 쌓였을 업장(業障)을 풀고자 함이다. 절을 했더니 먼저 똥배가 자취를 감췄다."

이곳에서 김씨의 개인전이 30일까지 열린다. 미황사 누각 자하루에 '영주 부석사' '금강산 신계사' 등 대표작 45점이 걸려 있다. 향 연기가 펜선처럼 조용히 퍼지는 산사(山寺)의 전시장에서 지난 30일 개막식이 열렸고, 국내 및 터키·요르단 등 세계 각지의 세묘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특히 자하루에서 올려다보이는 대웅보전을 0.05㎜ 펜촉으로 옮긴 '해남 달마산 미황사'가 실경(實景)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대웅보전 기둥을 만지면 살처럼 부드럽다. 참으로 아름다운 경지다. 뒤로 펼쳐진 달마산 연봉(連峯)은 오백나한상처럼 보이는데, 그 덕인지 그림에서 기(氣)가 나온다 하더라. 원래 한 번 그린 곳은 또 가지 않는데, 미황사 대웅보전만 세 번을 그렸다. 전생의 연이 깊은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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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보덕암'(2007)과 '영국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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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명함엔 미황사 대웅보전에 달린 용머리 목각이 그려져 있다. "대웅보전 용머리가 두 개인데, 자세히 보면 오른쪽 용머리에는 여의주가 없다. 꿈을 꿨는데…." 성공은커녕 생계 보장도 안 되는 펜화의 길을 혼자 걷던 2001년 무렵이었다. 꿈에 용이 나와 그의 입에 여의주를 넣어줬다고 한다. "입 안이 너무 뜨거워 꿈에서 깼다. 이틀 뒤 신문 연재 청탁이 왔고 이후 서서히 이름이 알려졌다."

지금껏 펜화 300여점을 그렸다. 1995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처음 서양 펜화를 접한 뒤, 잘나가던 광고 디자인 회사까지 접어가며 이룩한 숫자다. "25년 작업 인생에서 변곡점이라면 2003년 '봉암사 일주문'이다. 특별한 풍경은 아니다. 차라리 고졸(古拙)하다 할 것이다. 그려놓고 보니 좋은데 왜 좋은지 모르겠더라. 나중에야 알았다. 저 그림엔 내가 없구나. 멋지게 그리겠다는 욕심 자체가 없구나." 이 그림은 2004년 첫 개인전 당시 첫 손님으로 온 배우 고두심이 사갔다.

먼저 사진을 찍고, 작업실에 앉아 종이에 샤프 연필로 옮긴 뒤, 펜촉에 먹물을 찍어 그린다. 이 과정이 두어 달 걸린다. "나는 필법을 만들거나 구사하지 않으려 한다. 모든 사물은 그 나름의 표면 질감을 지닌다. 이 특성을 그대로 옮기는 데 작가의 필법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가능한 한 내 눈이 무색무취해야 한다." 펜화를 시작하며 철저히 채식을 고집한 이유도 이것이다. 수행하듯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지금은 화엄사 각황전을 그린다. 그는 "모든 게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다.

[해남=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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