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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 (목)

한국미술 100년 돌아보는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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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전선택의 ‘환향(還鄕)’. 야트막한 언덕을 배경으로 여러 명의 인물들이 수평적 구도 안에 배치된 작품이다. 인물들의 형태는 원통형으로 단순화됐으며 얼굴의 표정도 생략됐다. 안고 있는 중앙의 두 사람을 중심으로 주위의 인물들이 모두 극적인 상봉의 동작을 취하고 있어 연극적인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민족 특유의 화해와 사랑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1961년 최인훈은 소설 ‘광장’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역사에서 광장은 민주화를 거쳐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열망과 저항의 목소리로 들끓는 공간이었다. 광장과 밀실을 오가며 역사의 흐름은 바뀌었다. 미술가들도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붓을 들고 민족의 아픔과 비극을 새기고 자유와 독립, 민주주의를 외쳐왔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진화해온 한국미술 100년을 돌아보는 대규모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MMCA) 개관 50주년 기념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다. 구한말의 채용신으로부터 이중섭, 이응노, 김환기 등의 근현대 작가와 서도호, 함양아 등 현대미술을 지향하는 작가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290여명의 작품 450여점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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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신(1850~1941)의 ‘전우 초상’. 채용신은 을사늑약 체결 후 1906년 낙향하여 전라도 일대에서 활동하며 지역의 우국지사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작품의 모델인 전우(1841~1922)는 을사늑약 오적을 처단할 것을 상소하고, 경술국치 후에는 전라도의 작은 섬들을 옮겨 다니며 ‘도학(道學)’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림은 1919년 고종이 붕어한 뒤 백관과 상복을 입고 3년상을 치르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전우의 극사실적인 얼굴에는 비통함과 결연함이 동시에 묻어 나온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00년부터 1950년까지를 다루는 1부는 덕수궁관에서, 1950년부터 현재까지를 통사적으로 바라보는 2부는 과천관에서, 동시대 한국 사회 이슈를 다루는 3부 전시는 서울관에서 펼친다. 미술관 개관 이래 3개 관에서 통합 전시를 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방대한 전시이지만 한국 근현대사를 회고하거나 한국미술 100년을 양식과 사조 변화 등에 따라 분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격동의 시간을 지나온 우리 역사와 사회를 중심축에 놓고 미술이 어떻게 종횡했는지를 살펴보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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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1932∼2019)의 ‘6·25 스케치-1950년 9월 개성역을 폭격하는 제트기’.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고바우 영감’을 연재한 김성환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스케치북을 가지고 전쟁 현장을 누비며 전쟁의 참상과 실상을 그렸다. 작가는 피난민, 병사, 폐허, 주검, 전투 장면 등 전쟁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크로키, 스케치, 동양화, 만화풍의 다양한 기법들로 묘사했다. 이 작품은 한국전쟁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전쟁의 경과를 낱낱이 묘사한 보기 드문 작품으로서 기록성, 사실성이 매우 강하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덕수궁관에서는 망국(亡國)의 시대에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고민했던 예술가들의 고민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19세기말 개화기부터 광복에 이르기까지 의로움을 좇은 인물들의 자취를 돌아보면서 그들이 가까이한 예술을 함께 포갰다. 을사늑약 체결 후 낙향해 우국지사 초상화를 주로 그린 채용신의 대표작 ‘전우 초상’(1920), 의병 출신 화가의 지조와 절개를 보여주는 김진우 ‘묵죽도’(1940), 광복의 기대감 속에서 붓과 팔레트를 든 자신의 모습을 그린 이쾌대의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1940년대 후반) 등이 대표적이다.

아울러 일제강점기 우리 고유의 미학을 찾으려 했던 월북 작가 최재덕의 ‘한강의 포플라 나무’(1940년대)와 ‘원두막’(1946)이 처음 일반에 공개된다. “이중섭이 남으로 왔고 최재덕이 북으로 갔으니 비겼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화격이 뛰어난 최재덕은 월북 작가라는 점 때문에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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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1913~1965)의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한국의 전형적인 자연 풍경과 평화로운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채 한 손에는 붓과 팔레트를 들고 당당히 정면을 응시하는 화가의 자화상이다. 해방이 되었다는 기대감 속에서, 한국의 정서와 정신을 배경으로 당차게 앞을 향해 나아가리라는 화가 자신의 다짐과 같은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최대 규모인 과천관 전시에서는 1950년부터 현재까지 현대미술 역사를 한국 사회와 광장을 통해 되돌아본다. 회화부터 조각·영상·설치 등의 작품을 통해 우리 미술의 진화도 엿볼 수 있는 자리다. 전시장은 소설 ‘광장’에서 빌려온 ‘한길’ ‘회색 동굴’ 등 7개의 주제로 구성된다. 로비에는 1987년을 상징하는 최병수 ‘한열이를 살려내라’ 걸개그림과 최병수가 2년 뒤 학생 등과 함께 완성한 ‘노동해방도’가 걸렸다. ‘동백림 간첩 조작 사건’으로 수감된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노의 작품도 한 공간에 놓여 특별한 감흥을 부른다. 오윤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등장하는 걸개그림 ’칼노래’(1980년대)도 이번에 처음 전시된다. 이들을 비롯해 변월룡,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 유영국, 서도호, 이불,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등 200명의 작품 300점을 볼 수 있다.

지난달 먼저 시작한 3부 서울관 전시는 2019년의 우리에게 광장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했다.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광장을 움직인 공동체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개인이 맞닥뜨리는 문제와 상황은 어떤 것인지, 어떻게 극복해나갈 수 있을지 살펴본다. 오형근, 송성진, 함양아, 홍승혜, 에릭 보들레르, 날리니 말라니 등 작가 12명의 작품 23점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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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1946-1986)의 ‘칼노래’. 오윤은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이를 민족 형식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민중미술 작가이다. 그는 짧은 생애 동안 현실 속에서 고통 받으며 우리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판화로 표현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덕수궁관·서울관 전시는 내년 2월9일까지, 과천관은 3월29일까지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20세기 여명부터 현재까지 ‘광장’을 뜨겁게 달군 한국 근현대사와 미술을 조명하는 기념비적인 전시”라며 “이번 전시를 계기로 국내외 대중과 미술계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으로서의 역할과 위상을 확립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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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1914∼1965)의 ‘할아버지와 손자’. 박수근은 전쟁 이후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면서 서울 거리의 풍경과 서민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대상으로 그렸다. 이 작품은 변변한 일자리가 없었던 당시의 상황과 가난을 그대로 보여 준다. 수직적 구성은 조형미를 돋보이게 하며,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해 윤곽선이 거의 보이지 않아 작가 특유의 우둘투둘한 질감을 더욱 강하게 드러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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