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drug) 나쁘다고 의약품(drug)까지 나쁜 건 아냐”
‘2019 중독 치유 해법 포럼’ 정계, 의료계 등 80여명 참석 성황리에 마쳐
이상규 한림대 의대 교수의 사회로 종합토론 및 질의응답 중인 정영철 연세대 의대 교수, 김동현 서은주심리상담센터 부센터장, 우탁 경희대 디지털콘텐츠학과 교수, 한스 유르겐 럼프 독일 뤼벡대 심리학부 교수, 정슬기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단상 왼쪽부터). [박해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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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이 즐기는 게임 아이템이 1개당 1억5000만 원~2억 원에 거래된다면 과연 정상적인 게임일까. 게임이 청소년기 대뇌 성숙을 편향되게 유도해 뇌의 정보처리 기능을 왜곡시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도박이나 다름없는 유사 콘텐츠를 과연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10월 30일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열린 ‘2019 중독 치유 해법 포럼’에서 국내·외 전문가들은 주제 발표를 통해 이 같은 의문을 제기하며 “게임에 대한 정의부터 재정립해야 할 시점”이라고 입을 모았다. 동아일보와 중독포럼이 ‘즐거움과 중독이 경계’를 주제로 공동 주최한 이날 포럼에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바른미래당 간사인 최도자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윤일규 의원, 의료계 및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 80여 명이 참석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주제 발표에는 김동현 서은주심리상담센터 부센터장, 정영철 연세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교수, 우탁 경희대 디지털콘텐츠학과 교수, 한스 유르겐 럼프 독일 뤼벡대 심리학부 교수 등이 참여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5월 ‘게임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일상생활 기능손상 상태’를 ‘게임 사용 장애’라는 질병으로 분류했다. WHO가 국제질병분류 개정을 공표하면서 게임에 대한 논란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교수들은 각자의 주제발표에서 이 논란의 원인과 해법을 제시하는데 주력했다. 그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 게임 내 사행성 장치의 실태와 문제점
“게임 아이템 개당 1억5000만 원~2억 원까지 거래”
- 김동현 서은주심리상담센터 부센터장
게임에서 확률형 아이템은 재미를 높이는 요소다. 문제는 게임업체들이 이 아이템을 악용해 사행성을 조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3세부터 이용할 수 있는 게임이 11만 원까지 결제가 가능하다. 그것도 한 달에 두 번씩 할 수 있다. 어머니가 병원 치료비로 쓰기 위해 모은 돈을 자녀가 확률형 아이템을 사기 위해 탕진한 경우도 있다.
콘텐츠분쟁조정위원회가 발표한 게임 분야 ‘콘텐츠 분쟁’ 사건 건수를 보면 ‘미성년자 결제’로 인한 분쟁 건수가 가장 많다. 확률형 아이템 거래를 주선해주고 돈을 버는 업자들까지 생겨났다. 정확히 드러난 건 아니지만 확률형 게임이 아이템 거래사이트와 연계됐을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도박 수준의 낮은 획득 확률도 문제다. 국내 166개 게임들의 유료 확률형 아이템을 전수조사를 해보니 최저 획득 확률 평균값이 0.07%였다. 주사위를 여섯 번 던져서 모두 같은 숫자가 나올 확률이다.
도박 사이트를 모사(模寫)한 게임은 도박이나 거의 다를 게 없다. 실제로 돈을 베팅하느냐 안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도박 모사 게임을 한 청소년들 중에는 실제 도박 사이트로 넘어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청소년들이 몇 천만 원까지 사채를 쓰기도 한다. 심지어 게임비 마련을 위해 불법도박이나 카드깡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건전한 게임문화 조성을 위한 자율규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행성 문제는 계속 나타나고 있다. 자율규제라는 게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 게임 중 자율규제 모니터링 대상에 포함된 게임의 비율이 0.03%에 불과하다. 나머지 99.9%의 게임은 사실상 방치된 상태다.
자율규제평가위원회에서 자율규제를 잘 지키는 게임에는 인증마크를 부여하는데, 이들 게임의 아이템 획득 확률을 보면 너무 희박하다. 자율규제 인증을 받은 국내 게임의 최저 확률은 0.00000083%인데, 자율규제를 준수하지 않는다는 한 해외 게임 최저 확률은 0.027875%다. 오히려 인증 받지 않은 해외 게임의 확률이 3만3584배 이상 높다.
가장 허점이 많은 부분은 환전거래다. 아이템의 현금화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논란이다. 게임업체에서는 공식적으로 환전 거래는 없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카톡이나 오픈 채팅방을 이용해서 개인 간 거래가 이뤄진다. 어떤 게임 아이템은 현금가로 1억5000만원에서 2억 원까지 거래되는 실정이다.
● 게임의 중독성 사용에 대한 뇌 과학
“게임 사용 장애 학생 뇌 반응과 영역 달라”
- 정영철 연세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교수
사람마다 게임을 즐기는 이유는 아주 다양하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로제 카유아는 인간의 놀이를 경쟁, 우연, 모방, 현기증 등 네 개의 범주로 분류했다. 규칙이 있느냐 없느냐, 참여하는 사람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느냐 등에 따라 나눈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규칙이 있고 참여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체스나 바둑 같은 경쟁놀이, 규칙은 있지만 승부가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주사위나 카드 같은 우연놀이, 참여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규칙은 없는 할로윈이나 연극 같은 모방놀이, 규칙도 없고 참여 의지도 필요 없이 그냥 몸을 맡기는 그네나 롤러코스터 같은 현기증놀이로 구분할 수 있다.
요즘 청소년들이 즐기는 게임은 이 모든 요소들이 다 포함돼 있다. 특히 확률 게임은 우연적인 요소가 아주 극단적으로 디자인된 것들이 많다.
게임 규칙에 따른 전략적인 요소(경쟁, 모방)를 즐기느냐, 흥분적인 요소(우연, 현기증)를 즐기느냐를 놓고 게임이용자 분석을 해 보면 흥분적인 요소를 즐기는 청소년들이 많은데 이유가 있다. 뇌 과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도파민 회로와 연관이 있다. 쥐 실험을 통해서도 확인된 것인데, 어느 순간 예측할 수 없는 보상이 주어질 때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회로 활성화가 극대화된다.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모든 스포츠에 이런 요소가 있다. 게임업체들이 이런 요소를 아주 주도면밀하고 과도하게 게임에 심을 경우 왜곡된 행위와 패턴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전략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는 게임일수록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향식 정보처리(top-down processing)가 중요하다. 그에 반해, 예측하기 힘든 우연적이고 흥분적인 요소가 많은 게임일수록 그때그때 자극에 빠르게 반응하는 상향식 정보처리(bottom-up processing)의 비중이 커진다.
게임 사용 장애로 보이는 중학생 18명과 일반적으로 게임을 즐기는 중학생 18명의 MRI를 촬영해 비교해본 적이 있는데, 뇌 반응에 차이를 보였다. 일반 중학생들은 집중하는데 필요한 뇌 영역만 활성화된 반면, 게임 사용 장애 학생들은 무시해야 할 자극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뇌 영역까지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집중력과 관련된 뇌 영역이 약해지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는 각 개인의 충동성과도 연관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게임 이용 장애 아이들은 게임 즐기면서 게임 패턴도 달라지고, 게임을 즐길 때 사용하는 뇌 영역도 달라졌다. 이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보처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균형 잡힌 정보처리가 이뤄져야 하는데 한쪽으로 편향된 정보처리를 할 경우 대뇌 성숙이 진행되는 청소년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게임 자체는 순기능도 있고 역기능도 있다.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 따라서 또는 게임이 만들어진 방식에 따라서 한쪽으로 편향될 여지가 있는 것이고, 그런 것들에 대한 가이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게임 과몰입에 영향을 주는 게임 요소와 메커니즘
“게임과 도박성 유사게임 개념 재정비할 시점”
- 우탁 경희대 디지털콘텐츠학과 교수
기존 일반적인 게임은 유료가 많고 끝이 있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네트워크 게임은 대부분 무료로 즐길 수 있는데 끝이 없다. 게임업체들은 게임 이용자(유저)들을 지속적으로 잡아놓기 위해 수많은 요소들을 만들어 놓는다.
게임 디자이너들의 궁극적 목표는 게임 사용자들이 디자이너가 만든 모든 콘텐츠를 즐기고 경험할 수 있도록 몰입시키는 것이다. 이용자가 게임의 끝을 보거나 게임에서 지면 몰입에서 빠져나가기 쉽다. 그러지 못하도록 게임에 끝도 없고 패배도 없다. 게임 이용자들은 끊임없이 이기기 위해 게임을 하고 돈을 쓴다.
초기 네트워크 게임은 일반적인 게임 메커니즘과 유사했다. 스토리와 시각효과, 테마, 메커니즘 등이 균형을 이뤘다. 하지만 점차 확률이라는 특정 메커니즘만 활용하거나 강조하면서 동기부여 이상의 몰입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변질돼 가고 있다. 특히 이 확률게임의 아이템이 현금 전환이 가능해면서 재정파탄에 이른 게임 이용자도 늘고 있다.
일부 게임은 실력보다 행운에 바탕을 둔 도박에 가깝다. 심지어 어떤 게임은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AI)이 대신하기도 한다. 이런 유사게임 콘텐츠를 게임이라는 카테고리로 함께 묶어서 고민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이제 정상적인 게임과 사실상 도박과 같은 유사게임에 대한 개념을 재정비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게임은 문제가 없는데, 게임을 사칭한 유사게임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마약(drug)이 나쁘다고 의약품(drug)을 함께 묶어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금의 도박성 유사게임은 결코 게임이라고 할 수 없다.
● 게임의 중독성을 증가시키는 요인들과 예방 대책
“한 판 깰 때마다 게임 중단 더 어려워져”
- 한스 유르겐 럼프 독일 뤼벡대 심리학부 교수
전 세계적으로 게임은 청소년과 젊은 층에서 인기가 높다. 게이머 대부분은 게임을 오락으로 즐기지만, 일부는 중독적 행동 패턴을 보인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국제질병분류 개정안(ICD-11)에서 게임 장애를 도입한 이유다.
게임 장애로 분류하는 기준은 크게 4가지다. 게임에 대한 통제기능(시작, 빈도, 강도, 지속시간, 종료)이 손상됐거나, 삶의 다른 관심사나 일상생활보다 게임을 우선시하는 경우, 학교나 가족, 사회, 직장 등 중요한 영역의 기능에 심각한 손상을 일으킨 경우, 이런 현상이 최소 12개월 이상 지속되는 경우다.
중독의 주요 위험요인 중 하나가 보상이다. 아바타의 기술, 무기, 도구 또는 게임 머니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또 다른 위험 요인은 토큰 시스템인데, 게임 중 계속 변하며 간헐적으로 제공되는 보상이다. 그래서 “한 판을 깰 때마다 게임을 중단하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는 말이 있다.
최근 게임들은 도박 아이템을 점점 더 많이 포함시키는 추세다. 게임 중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는 랜덤박스를 구매하게 함으로써 랜덤으로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 그 예다. 게임과 도박이 결합하는 또 다른 예는 돈을 지불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도박성 게임의 출현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위험이 있다. 하나는 게임의 중독성이 강해진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게이머들이 실제로 돈을 버는 온라인 도박에 유혹을 느끼고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독일약물위원회(German Drug Commissioner)는 전문가 집단을 선임해 게임장애 예방 조치를 검토하고 구체적인 권고안을 마련했다. 먼저 미성년자 보호를 위해 △연령 제한 △게임 중독성 요소 관리 △2세 이하 영유아 게임 금지를 위한 ‘연령 제한 없음’ 폐지 △중독성 게임 광고 제한을 권고했다. 위원회는 이와 함께 게임업계가 게임을 만들 때 △중독성 요소 감소 △게임시간과 비용에 대한 경고문 △게임 머니 현금 고지 △간편 결제 금지 △게임 중지에 따른 부정적인 결과 없도록 하는 등 자율규제를 위한 기술적 선택을 해줄 것을 제안했다.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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