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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죽음을 생각한 청년, 자기 사진 한 장에 힘을 얻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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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영정사진 찍는 홍산 작가

"내가 진짜로 지금 죽는다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요? 생각할 시간을 갖게 해줍니다"

서울 망원동의 이름 없는 작은 사진 스튜디오에는 영정사진들이 군데군데 붙어 있다. 검은 배경에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부터 환하게 웃거나 손으로 '브이(V)'를 지은 이까지 표정과 자세는 각양각색이다. 사진의 주인공들은 죽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젊은이들이다.

홍산(24)씨는 20·30대의 영정사진을 찍는 사진작가다. 평일에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광고회사에 다니면서 주말을 이용해 사진을 찍는다. "돈에 얽매이는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아 직장 생활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사진작가 홍산씨가 자신이 찍은 젊은 사람들의 영정사진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오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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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한 후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홍씨가 젊은 사람의 영정사진을 찍기 시작한 건 지난해 초. 당시 빠듯한 생활비로 취업 준비를 하던 홍씨는 불면증에 시달리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힘든 순간 누구나 쉽게 뱉는 이 말에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내가 진짜로 지금 죽는다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라는 고민을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언어인 사진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사진은 젊은이들에게 적지 않은 인기를 끌고 있다. 영정사진 촬영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20대 75명이 그를 찾았다. 최근에는 한 TV 예능프로그램에 섭외돼 유재석, 하하, 안정환 등의 사진도 촬영했다. 젊은 세대가 영정사진에 관심을 갖는 이유에 대해 홍씨는 "사회는 청년들에게 백 번 넘어지면 백한 번 일어서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스펙을 쌓기도 어렵고 취업을 하긴 더욱 어렵다"며 "신체가 죽는 건 아니지만, 노력해도 안 된다는 무기력함에 젊은 사람들이 심리적인 '죽음'을 경험하는 것 같다"고 했다.

홍씨는 영정사진을 찍으러 오는 손님들에게 유서를 작성하도록 하고, 그에 대해 한 시간 가까운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그는 "어색해서 증명사진 찍기도 힘들다는 분들도 생각의 시간을 가진 뒤에는 그 사람이 표현하고 싶은 가장 자연스러운 표정이 나온다"고 했다.

그에게 '본인의 영정사진은 어떻게 찍고 싶으냐'고 물었다. 홍씨는 "내 얼굴이 예뻐 보이는 각도로 아주 진지한 사진 하나, 웃기는 표정 짓고 찍은 '엽사(엽기스러운 사진)' 하나 찍어놓고 장례식장에 둘 다 걸어놓고 싶다"며 "그게 내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은 모습"이라고 했다.

본인의 유언장에는 어떤 말을 남길까. "장례식장에서 소주와 육개장을 치우고 3일장(葬)을 신나는 노래, 피자와 맥주가 가득한 파티로 만들어라. 이렇게 적을 것 같아요. 죽는 사람이 원하는 모습의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고 싶어요. 제가 마냥 진지한 표정뿐만 아니라 웃는 얼굴, 재미있는 표정의 영정사진을 찍는 이유입니다."





[김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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