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4 (수)

이슈 텔레그램 n번방 사건

[n번방 수사]“성착취 피해자에 2차 가해 멈춰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성범죄와 피해자를 ‘오락거리’로

도 넘은 행태에 온라인 신고 운동

“스스로 영상을 찍었는데 왜 피해자냐.” “당해도 싸다.”

텔레그램에서 성착취 영상을 유포한 ‘박사’ 조주빈씨(25) 검거 후 텔레그램 파생방에 남은 이들이 주고받은 대화다. 이들은 피해 사실과 피해자의 신상을 ‘오락거리’처럼 공유하기도 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온라인상에는 “피해 여성도 잘못”이란 글이 이어졌다. <반일종족주의> 공동저자인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지난 22일 페이스북에 “(내) 딸이 피해자라면, 딸의 행동과 내 교육을 반성하겠다”고 적었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가 이어진다.

조씨와 ‘갓갓’ 등이 ‘일탈계’(얼굴이나 신상정보 없이 자신의 노출 사진이나 글을 올리는 일탈계정의 줄임말)를 운영하거나 조건만남을 한 미성년 여성에게 접근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지면서, 단초를 제공한 피해 여성에게도 책임이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피해자다움’ 요구 반복…방치 땐 n번방 재현 못 막는다

전문가들은 피해자에게 피해 책임을 묻는 ‘2차 가해’를 멈추고 디지털 성범죄가 발생한 본질을 봐야 한다고 했다. 또 일탈계 운영과 그에 대한 범죄는 별개다.

누리꾼들은 ‘2차 가해를 멈춰달라’며 자체적으로 SNS에서 2차 가해 발언과 불법촬영물 판매를 신고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 ‘진짜’ 피해자를 가려내는 방식의 2차 가해는 구조적 문제를 가린다”며 “한국 사회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착취하는 일이 공기처럼 만연했다는 사실을 돌아봐야 할 때”라고 했다.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2차 가해는 성범죄 사건마다 반복됐다. 성범죄 사건에서 ‘진짜 피해자’와 ‘가짜 피해자’를 구분하는 일이 잦았다. 많은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들은 ‘왜 짧은 치마를 입었나’ ‘왜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나’ ‘왜 신고하지 않았나’ 같은 질문을 받았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 ‘꽃뱀’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진정한 피해자로 인정할 만한지, 피해자답게 굴고 있는지 등 기준을 만들어 피해자를 배제하고 낙인찍는 2차 가해는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다”며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서 벌어지는 2차 피해도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2차 가해는 피해자를 침묵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피해자가 자신을 검열하면서 피해 사실을 수사기관에 알리거나, 상담·지원센터에 도움을 청하는 일도 망설이게 된다. 서 대표는 “피해자들은 지원을 요청할 때도 ‘고민하다가 연락드린다’며 말문을 연다”면서 “순결한 피해자를 강조할수록 피해자는 스스로가 피해자 기준에 미달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피해 회복이 어려워진다”고 했다.

2차 가해를 방치하면 ‘n번방’은 무대를 바꿔 또다시 등장할 수 있다. 송 사무처장은 “ ‘일탈계’를 운영한 여성, 보호받을 가치가 없는 여성이란 식으로 피해자를 구분하면, 결국 가해자가 범죄를 저지르기 쉬운 환경이 된다”고 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피해자를 향해 사건의 책임을 물으면 본질이 흐려진다”며 “가해자에게 ‘왜 사진을 유포했는지’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물어야 한다”고 했다.

조씨 검거 후 ‘n번방’에 참여한 남성 전부에 대한 신상 공개와 처벌 요구가 높아지자 SNS에선 ‘n번방 안 본 남자들 일동’이란 이름으로 ‘#내가_가해자면_너는_창녀다’라는 해시태그가 등장했다. 이들은 국내 성매매 종사 여성이 27만명이란 통계를 올리며 “ ‘n번방’을 이유로 모든 남자가 가해자라면, 모든 여성은 ‘창녀’로 일반화할 수 있다”고 했다.

김여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피해지원국장은 “이런 프레임은 오히려 한국 사회가 여성의 신체를 성적으로 소비해왔다는 걸 드러내는 방증”이라며 “텔레그램 성착취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여성의 신체가 어떤 방식으로든 성적으로 상품화될 수 있는 구조가 깔려 있다”고 했다.

서 대표도 “텔레그램 성착취 문제는 신종 범죄처럼 다뤄지지만, 사실 성폭력, 성매매 등 만연한 강간문화를 변주한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라며 “사회에 얼마나 이 문제가 만연해 있었는지,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은지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위한 상담 및 삭제 지원, 의료·법률·수사 지원 연계를 받을 수 있다. 센터에서 제공하는 지원은 모두 무료다. 상담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5시다. (02-735-8994, www.women1366.kr/stopds)

김희진·탁지영 기자 hjin@kyunghyang.com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 유튜브 구독▶ 경향 페이스북 구독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