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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크리틱] 배움을 붙잡아둔다 / 김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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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영준 l 열린책들 편집이사

별로 여러 회사를 거친 것도 아니지만, 근무 중인 회사의 경영권이 넘어가는 일을 세번 겪었다. 사장이 아니라 오너가 바뀌는 일 말이다. 당일 아침에 “여러분의 행운을 빕니다”라는 황당한 통보를 듣고 20분 뒤 새로운 오너와 면담한 일도 있었다. 오너가 바뀌면 예외 없이 전보다 힘들었다. 특히 세번 중 마지막의 경우는 내가 더 이상 어린 직원이 아니고 다른 직원들을 이끄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꽤 괴로웠다. 사실 이끌지도 못했다. 그건 다른 주제니까 여기선 생략한다.

가장 큰 곤란은 다른 업계에서 온 새 오너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지시를 받으면 늘 두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그 일에 관계된 ‘관행’ 또는 업계 상식이 어디까지 용인될지 알 수 없었다. 둘째, 무엇이 ‘관행’인지 나도 몰랐다. 늘 관행에 젖어 있기 때문에 관행인 줄도 모르고 있었음이 밝혀지는 식이었다. 새 오너 역시 의사소통에 답답함을 느꼈을 텐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회의 시간에 오너가 하는 말을 한 자라도 놓칠세라 깨알같이 받아 적는 것이었다. 그걸 일하는 중에도 읽고, 보고서를 제출하기 전에도 읽고, 복사해서 직원들에게 참고하라고 나눠주기도 했다. 물론 이런 애처로운 방법 외에, 능력을 발휘해서 신뢰를 획득한다는 좋은 방법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나는 2년 반 뒤에 퇴사했다.

몇해 전 서울대 우등생 중 대략 90%가 교수의 강의를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받아 적는다는 뉴스가 화제가 되었다. 총명한 학생들이 고백한 바에 따르면 ―여기에는 자기 비하적인 유머가 없지 않다고 생각되는데― 그게 좋은 성적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비교가 된 미국의 명문대생들은 이런 답답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성적군에 속하든 시험 전략에 무관심했다. 이는 고학점자일수록 전략에 신경 쓰는 서울대생과 뚜렷이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자, 얘기가 이렇게까지 나왔다면 뉴스의 결론이 서울대, 나아가 한국의 교육이 창의성을 억압한다든지 시대에 뒤졌다든지 하는, 기지(旣知)의 사실로 회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시험 전략에 대한 미국인들의 무관심이다. 이왕 비교 조사를 했으면 이 무관심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혔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모든 차이를 낳는 것은 바로 그것인 듯하기 때문이다.

교수가 강의 때(또는 사장이 회의 때) 하는 말을 학생이 빠짐없이 받아 적는 것은 시험 같은 특수한 스트레스 상황에 대처하기 위함이다. 시험이 스트레스 상황이 아닌 적은 없지만, 문제는 스트레스가 시험 기간만이 아니라 학기 내내, 4년 전체를 지배할

정도로 지독해졌다는 것이다. 늙어버린, 이제 교수와 같은 나이가 된 세대는 이 달라진 광경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그동안 취업을 박탈당한 세대에 대한 여러 담론(88만원 세대부터 헬조선까지)이 출현했지만, 왜 학생들이 자기들 때와 다르냐는 문제에 이르면 정작 사회경제적 원인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받아 적기를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임시방편쯤으로 폄하할 수도 없을 것 같다. 1513년 마키아벨리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단테가 말했듯이, 배운 것을 잘 붙잡아 두지 않는다면 지식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현인들(책)과의 대화에서 얻은 배움을 적어 두었다.” 지식은 새로운 것의 생산이고, 생산에는 재료와 창고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잘 붙잡아 둔” 배움의 모습은 필기일 수도 있고 암기일 수도 있다. 암기를 위해서라도 필기는 해두어야 할 것 같다. 생각해보니 받아 적기 자체에는 별로 죄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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