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역 투입 3공수여단
일선 지휘관 “실탄 지급은 발포 지시”
보안대 문서에는 발포명령 하달 적혀
신군부는 위협사격 사실만 겨우 인정
김병두 보안사 육본 지원 준장 진술
“실권자는 전두환…보안사가 지휘해”
1980년 5·18 때 계엄군의 총에 맞아 남편이 숨진 정귀순씨는 아직까지 누가 총을 쏘게 했는지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정대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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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레 끌고 다님서 쎄빠지게 고생하다가 5·18 때 돌아가셔부렀지라.”
지난 13일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 집에서 만난 정귀순(78)씨는 5·18 이야기를 꺼내자 한숨부터 쉬었다. 정씨의 남편 김만두(1936년생)씨는 5월20일 밤 광주역 앞에서 공수부대 군인이 쏜 총을 맞고 병원으로 옮겨져 사흘 만에 숨졌다. 남편 김씨는 광주역 앞에서 군인들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변을 당했다. 정씨는 “남편이 총을 맞고 숨졌는데, 누가 총을 쏘라고 했는지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육사 13기)의 검찰 진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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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역 첫 집단발포 사건’을 일으킨 부대는 1980년 5월20일 추가로 투입된 3공수여단이다. 12·12 및 5·18 검찰 수사(1996년 1월17일) 때 3공수여단장이었던 최세창(86·육사 13기)은 “실탄 지급 명령은 단독으로 내린 결정이고, 발포해도 좋다는 취지로 지급한 것도 사실인가”라는 질문에 “대대장의 건의를 받아 제가 내린 결정이며, 위협용으로 사용을 하고, 그 밖의 목적이 있을 때는 사전에 보고를 하고 사용을 하라고 했다”고 답변했다. 최세창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이끌던 군내 사조직 하나회의 핵심으로 12·12 쿠데타에도 가담했으며, 전두환·노태우 정권 내내 승승장구해 1군단장, 3군사령관, 합참의장을 거쳐 국방부 장관까지 지냈다.
광주 505보안대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광주 소요 사태’라는 기밀문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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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05보안대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광주 소요 사태’라는 기밀문서에 나오는 ‘발포명령 하달(1인당 20발)’이라는 대목은 발포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5월21일 0시20분’에 작성된 이 기밀문서는 5월20일 밤 발포 명령이 하달됐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지휘관들은 ‘실탄 지급=발포 명령’으로 이해했다. 5·18 당시 일선 대대장들은 검찰 수사에서 “여단본부에서 실탄을 전달한다는 것은 위급한 상황 등에 필요한 경우에는 발포해도 된다는 의미”라고 진술했다. 윤수웅 당시 3공수여단 정보참모(소령)는 “5월20일 밤 9시30분 전남대 교내 도로가에 있던 (최세창) 여단장이 ‘이거 11대대에 갖다주고 와!’라고 말하며 2.5t 트럭 위에 실리고 있던 실탄 박스를 가리켰다”고 진술했다. 광주역 첫 집단발포로 김만두씨와 김재화(25)·김재수(25)·이북일(28)·박세근(36)씨 등 시민 5명이 총을 맞고 숨졌다.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 지휘관들의 검찰 진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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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쪽은 그동안 위협사격만 인정했다. 최세창은 “5월20일 밤 11시30분 박종규 중령(15대대장)이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권총으로 공포를 탄창 한개 분량인 7발을 쐈다”고 진술했다. 김종헌 당시 3공수여단 작전참모(소령)도 검찰에서 “실탄을 싣고 광주역으로 가던 중 광주역 사거리 조금 못 미친 지점에서 뒤에서 갑자기 총성이 들렸으며, 저도 같이 권총을 몇발 공중으로 쏘았다”고 말했다. 5월19일 광주고 앞 첫 발포는 계엄군의 위협사격 성격이 강했지만, 5월20일 광주역 첫 집단발포는 의미가 다르다.
광주역 첫 집단발포 이후 계엄사령부는 5월21일 새벽 사실상 자위권 발동을 결정했다. 군인들이 위험에 처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군인복무규율(123조)과 위수령상의 자위권에 근거해” 정당하게 발포했다는 것이다. 5·18 연구자 이재의 박사는 “위수령은 영구히 주둔하는 부대에 한한다는 점에서 (특정 지역에 출동해 작전하는) 공수부대에 적용될 수 없는 조항이고, 군인복무규율 역시 보초(초병)의 무기 사용에 관한 것이어서 공수부대의 집단발포가 초병으로서의 권한 행사로 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당시 보안사에서 육군본부에 지원을 나갔던 김병두 준장의 검찰 진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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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0일 밤 광주역 첫 집단발포로 시민 5명이 총을 맞고 사망했지만 그 누구도 내란목적 살인죄로 기소되지 않았다. 이튿날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36명이 사망한 것도 마찬가지로 발포명령자를 찾지 못한 채 12·12 및 5·17 쿠데타의 와중에 발생한 ‘폭동 피해’로 판결이 났다. 전두환·이희성·주영복·황영시·정호용 등 5명의 내란목적 살인죄의 증거로 제시돼 법원이 인정한 희생자는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상무충정작전·5월26일 밤~27일 새벽) 때 총격을 받고 사망한 18명뿐이다.
5·18 발포명령 책임자 규명은 지휘권 이원화 문제와도 연결된다. 정식 군 명령 체계 외에 당시 보안사-특전사-공수여단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사실상 발포명령 등 ‘작전’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보안사령부에서 육군본부로 지원을 나갔던 김병두 준장은 검찰 수사에서 “발포명령은 누가 지시했는지 알 수 없으나, 광주사태 당시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로서 이희성 계엄사령관보다 서열이 높았고, 실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계엄사 측에서는 보안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1980년 5월20일 광주역 인근에서 총을 맞고 숨진 김만두씨. |
문제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점이다. 1995년 12·12 및 5·18 수사에 참여했던 전직 검찰 고위관계자는 “당시 수괴(전두환·노태우)를 제외한 주요 책임자들을 서울 평창동 올림피아호텔로 불러 한명씩 조사했는데, 나중에 맞춰보니 주요 대목에서는 진술이 서로 다 달랐다”며 “이미 15년이나 지난 일이어서 기억이 윤색돼 수사가 무척 어려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15년의 세배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진상규명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지난 12일 조사를 시작한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세월의 무게를 딛고 진상규명의 성과를 낼지 주목된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살해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한겨레>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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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5·18 당시 계엄군들은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해 공분을 샀다. <한겨레>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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