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형렬 지음/창비·9000원
고형렬(사진)의 시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때로 그의 시는 비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문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술 사이의 조응이 불분명해 보이는 사례가 적지 않다. 새로 나온 시집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에 실린 시 ‘사북에 나갔다 오다’를 예로 들자면, “새들이 잡고 있는/ 나뭇가지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이다”라거나 “그 허공 속에 나 있는 핏줄기의 길을 찾는/ 이슬이 햇살에 불타는 생각의 외출은/ 서쪽 집으로 길을 열어준다” 같은 대목은 여러번 곱씹어 읽어도 논리적 산문으로 쉽사리 옮겨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묘한 매력을 뿜어낸다. 그가 지난해 일곱권짜리 방대한 분량으로 낸 장자 에세이의 잔향 탓인지, 시집 전체가 어떤 신화적 세계를 그려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생으로 잎새가 잠드는 나무 그늘처럼/ 아직 떠나온 곳이 있다는 것은/ 현대적 신화”(‘203호 우편함에는’) 같은 구절이 그런 ‘신화적 독법’을 부추기는 듯도 하다.
고형렬 시의 모호함과 신화적 분위기는 서울로 대표되는 현대 도시적 삶의 뻔뻔한 현실주의에 대한 반발의 표출로 이해된다. “나는 서울이 다른 나라처럼 느껴진다”(‘써지지 않는 시 한편’)고 그는 말하는데, 그가 2008년부터 서울을 떠나 경기도 양평에 내려가 살고 있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서울 사는 K시인에게’라는 시에서 그는 “나는 K형이 매일 출근하던 그 도시의 수직과 불안이/ 싫었습니다 이 아픔은 치유되지 않을 겁니다”라고 쓴다. 편지 형식인 이 시의 수신자인 케이(K)형은 아마도 서울에 살던 시절의 그 자신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자신일 케이와 결국 “서로 행불자가 됐”다는 그는 이제 도시 거주민들을 비판적 거리를 지닌 채 바라본다. “자본주의 사회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모두가 작은 환희 같다”(‘비선대와 냉면 먹고 가는 산문시 1’).
시집은 전체적으로 현대 문명을 향한 환멸과 허무의 정조가 지배적인데, 그에 대한 치유의 방책으로 시인이 끝까지 매달리는 것은 역시 시이다. “아름다운 것이 맨 나중에 온다면/ 가장 아름다운 시는 모든 것의 맨 끝에/ 서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아로니아의 엄마가 될 수 있나’)라거나 “저 문명 속에서 매일매일 죽은 시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묻힐 것입니다/ 시는 죽음 속에서 흙을 밀어올리고 피어날 것입니다”(‘시의 옷을 입다’) 같은 대목에서 시의 가치와 부활에 대한 시인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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