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긴장 고조] 볼턴 회고록 후폭풍
가장 주목을 끈 부분은 볼턴 전 보좌관이 미·북 비핵화 외교 전 과정을 가리켜 "한국의 창조물"이라고 표현한 대목이다. '한반도 운전자·중재자론'을 내세운 문재인 정부가 사상 첫 미·북 정상회담 성사에 큰 역할을 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렇게 시작된 비핵화 외교가 작년 '하노이 노딜'과 '스톡홀름 노딜'을 거치며 좌초한 책임 역시 문 정부에 돌린 것이다.
볼턴 전 보좌관은 한국이 '창조'한 미·북 비핵화 외교를 정열적인 스페인 춤 '판당고'에 빗대며 "김정은이나 우리(미국)에 관한 진지한 전략보다는 한국의 통일 어젠다와 더 관련됐다"고 했다. 문 정부가 '미·북 중개 외교'를 구사하며 본질인 비핵화보다 남북 관계 개선 의욕이 앞섰던 점을 지적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2019년 2월 28일(현지 시각) 베트남 하노이의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에서 정상회담을 갖는 모습. 트럼프 대통령 오른쪽으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앉아있다. 양측은 이날 아무런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회담을 끝냈다. /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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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문 정부가 중개 외교에 뛰어든 2018년 3월부터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해왔다. 최대 논란은 대북 특사로 김정은을 만나고 돌아온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설명한 '북한의 비핵화 의지'였다. 당시 정 실장은 "북측은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며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고 이 유훈에 변함이 없다'는 김정은 발언도 소개했다. 북한이 핵·미사일 폭주를 이어오며 수없이 되풀이한 선전용 레토릭을 덥석 "비핵화 진정성"으로 해석한 것이다. 정 실장은 이 같은 평가를 토대로 미국을 방문,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미·북 정상회담 약속을 받아냈다.
김홍균 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19일 "당시는 사상 최강의 대북 제재 레짐(체제)이 막 완성돼 북한이 '제재(해제)냐, 핵무기냐'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던 상황"이라며 "김정은의 비핵화 진정성에 대한 우리 정부의 오판이 성급한 미·북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청와대는 1차 미·북 정상회담 이후 비핵화 협상이 겉돌자 절충안인 '조기수확론'과 '굿이너프딜' 개념을 들고 나왔다. 외교 소식통은 "조기 수확 같은 말 자체가 통상 교섭에서 쓰는 용어"라며 "비핵화 외교에 대한 청와대의 이해 부족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라고 했다. 굿이너프딜은 미·북 어느 쪽의 공감도 얻지 못한 채 하노이 노딜과 함께 '사망'했다.
수미 테리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트위터에 '볼턴 회고록' 내용을 소개하며 "볼턴은 문 대통령이 미·북 양측에 비현실적 기대를 만들었다고 비판했다"고 했다. 미국뿐 아니라 북한도 문재인 정부의 '부실 중개'에 불만이 크다는 얘기다. 하노이 노딜 후 북한이 남북 대화를 걸어잠근 것은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북이 문 대통령을 겨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행세 말라"며 막말을 쏟아낸 것도 이때부터다. 북한이 최근 '뻔한 술수' 등 거친 표현을 쓰며 청와대의 대북 특사 파견 제안을 걷어찬 것 역시 '남조선에 속았다'는 인식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청와대 측은 "회고록이 공식 발간되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 보도만을 보고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이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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