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인 손해보험 업계에 최근 ‘디지털 바람’이 거세게 분다. ‘디지털 보험사’가 하나둘 등장하면서 IT를 접목한 신개념 보험상품이 쏟아지는 중이다.
디지털 보험사를 규정하는 명확한 기준은 없다. 업계에서는 흔히 ‘세 가지 요건’을 갖추면 디지털 보험사로 본다.
첫 번째는 온라인 판매 채널이다. 보험설계사가 대면 영업하고 상품을 설계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온라인이나 모바일 채널을 활용하는지 여부다. 두 번째, 상품 설계 과정에서 IT 기술이 접목돼야 한다. 퍼마일 보험에서 활용된 ‘주행거리 측정 센서’가 좋은 예다. 꼭 실체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빅데이터나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설계한 보험상품도 여기 포함될 수 있다. 세 번째, 모바일 환경을 통해 보험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보험상품이 스마트폰 앱을 통해 구현되는지 여부가 핵심이다.
캐롯손해보험에서 선보인 ‘퍼마일 자동차보험’은 기존 보험과 달리 주행거리만큼만 보험료를 책정하는 신개념 보험이다. 사진은 보험 가입자의 캐롯손보 앱 캡처 화면. <캐롯손해보험 제공> |
▶1호 디지털 보험사 ‘캐롯손해보험’
▷보험설계사 0명, 개발자 60명
국내 1호 디지털 보험사를 자처하고 나선 곳은 ‘캐롯손해보험’이다. 캐롯손해보험은 한화손해보험, SK텔레콤, 현대차, 알토스벤처스가 합작해 만든 보험사다. 올해 1월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다. 모든 보험상품은 100% 비대면으로 판매된다. 직원 약 120명 중 절반 이상이 IT 개발자로 구성돼 있다. 모바일 앱과 웹사이트에서 보험 가입이 가능하다. 가입 채널 비중은 7 대 3 정도로 모바일이 더 많다.
캐롯손보는 출범 이래 자동차보험에 힘을 주는 모습이다. 합작사 구성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T맵을 운영 중인 SK텔레콤과 현대차가 주주로 참여했다. 단순 투자만 한 것이 아니라 상품 개발에도 적극 참여한다. ‘퍼마일 자동차보험’에서 주행거리를 측정하는 ‘캐롯플러그’는 SK텔레콤과 캐롯손보가 공동 개발한 기계다. 캐롯손보 ‘퍼아워 자동차보험’에는 현대차 ‘디지털키’가 활용됐다. 디지털키는 스마트폰 앱으로 차 문을 열고 시동을 걸 수 있는 기술이다. 기존에는 다른 사람 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최소 하루 전 보험에 가입해야 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당일 운전은 불가능했다. ‘퍼아워 자동차보험’은 디지털키 앱으로 키를 공유받은 사람이 차량 운행 전에 캐롯손보 앱으로 즉시 가입할 수 있는 보험이다. 최소 6시간부터 매 시간 단위로 보험료가 산정된다.
캐롯손보 관계자는 “주행거리, 주행시간에 기반을 둔 합리적인 보험료 계산 방식이 최대 장점이다. 퍼마일 자동차보험은 판매 시작 100일 만에 가입 1만명을 돌파했다. 연평균 1만5000㎞ 미만 운전자라면 기존 다이렉트 자동차보험 평균 대비 최대 30% 보험료 할인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자랑했다.
자동차보험 외에도 이색 보험이 많다. 지난 4월 선보인 ‘폰케어 액정안심보험’이 대표적이다. 오프라인 방문 없이 휴대폰 시리얼 넘버와 외관을 찍은 동영상을 업로드하면,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영상을 스캐닝해 액정 파손 여부를 확인한 뒤 보험 가입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파손 우려로 기존에는 보험 가입이 불가능했던 중고폰도 파손 보험에 비대면 가입할 수 있다.
필요할 때마다 스위치처럼 껐다 켰다 하는 ‘온디맨드 보험’도 인기다. 예를 들어 ‘스마트온 펫산책보험’은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나갈 때 앱으로 스위치를 켜면 보험이 가동된다. 미리 충전해놓은 보험료 2000원에서, 산책을 한 번 나갈 때마다 45원씩 차감된다. 스위치가 켜진 상태로 반려동물을 산책시키는 동안 사고가 발생하면 배상 책임, 유실견 찾기, 사망 사고에 대한 장례비 등을 보장받을 수 있다. 캐롯손보 관계자는 “일상에서 필요한 다양한 보험상품을 모바일로 그때그때 가입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보험료 면에서 가격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설계사 인건비도, 영업지점 운영비도 없기 때문에 사업비가 저렴하다”고 설명했다.
하나금융지주가 인수한 더케이손해보험이 6월 하나손해보험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디지털 손보사로 새롭게 출발했다. <하나손해보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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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금융·카카오도 설립 ‘박차’
▷미니보험 쏠림…수익성은 ‘의문’
가능성을 엿본 다른 기업에서도 잇달아 디지털 손보사 설립에 뛰어드는 모습이다.
지난 6월 1일 공식 출범한 하나손해보험이 대표적이다. 하나금융지주가 지난 2월 인수한 더케이손해보험이 이름을 바꿔 달고 디지털 기반 종합 손해보험사로 새롭게 출발했다. 하나손해보험은 하나금융그룹 내 최초의 손해보험사다. 아직 구체적인 영업 전략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과거 더케이손보 노하우에 하나금융 디지털 자산관리 역량을 결합한다는 청사진을 세웠다. 기존 더케이손보가 강세를 보였던 자동차보험의 온라인 판매를 보다 강화하고 여행자보험, 레저보험 같은 특화 보험상품도 선보일 예정이다. 권태균 하나손보 사장은 출범식에서 “대한민국 손해보험을 디지털로 손보겠다. 디지털 상품 비중을 계속 높여갈 계획이다. 새롭고 혁신적인 디지털 기반 플랫폼으로 손해보험 시장에 새바람을 불어넣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카카오페이도 차근차근 디지털 보험사 설립 준비를 해나가는 모습이다. 이미 지난 10월부터 ‘카카오페이 간편보험’ 서비스를 통해 암보험, 실손보험 등 다양한 보험상품을 선보였다. 카카오페이 사용자라면 누구나 비대면으로 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여러 보험사 다이렉트 자동차보험 상품을 한눈에 비교해주는 서비스와 동물등록번호 없이 사진만으로 가입 가능한 반려동물 보험상품이 호평받는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법인보험대리점(GA) 성격이 강하다. 즉 다른 보험사 상품을 판매하는 채널에 그친다. 카카오페이는 카카오와 함께 독자적인 디지털 보험사 설립을 계속 추진해나갈 예정이다. 카카오페이 관계자는 “디지털 보험사 설립을 준비 중이다. 금융당국과의 협의를 마치는 대로 신속하게 사전인가 신청을 진행할 계획이다. 구체적인 출범 시점과 판매 상품 등은 미정이지만 카카오톡 플랫폼을 기반으로 전 국민에게 다가갈 것”이라고 밝혔다.
디지털 손보사 설립이 잇따르지만 한계가 분명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주력 상품이 대부분 소액 미니보험인 탓에 수익성에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논리다. 디지털 보험업계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플랫폼 기반의 시장 자체가 커져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 손보업계 관계자는 “신생 보험사가 기존 대형 보험사와 경쟁해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니보험 등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많이 팔아야 한다. 하나금융, 카카오 등 대기업 진출이 시장 전체 성장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건웅 기자 wasabi@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64호 (2020.06.24~06.3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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