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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두발로 그리다…배려를 역설하는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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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My toes are free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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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 사이에 낀 붓이 캔버스를 오간다. 같은 동작이 반복되면 어느새 주황색 물감이 꽉찬 작품이 완성된다. 이른바 '발로 그린 그림'이다.

사진작가 노세환(42)은 지난 6개월 동안 발로써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지 실험해봤다. 발가락 사이에 가위를 끼운 채 꽃을 다듬을 수 있었고, 두 발로 주전자를 들어 뜨거운 차(茶)를 잔에 따를 수 있었다. 위태롭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과정을 영상에 담고 사진을 찍어 서울 신문로 복합문화공간에무 B2갤러리 개인전 '온실 속에 노마디즘 My Toes Are Free(발가락은 가능하다)'에 걸었다.

전시 제목 중 'My Toes Are Free'는 영어 관용구 'My hands are tied(미안하지만 도와주지 못하겠어)'를 비틀었다. 만약 손 대신 발이 자유롭다면 적극 도움을 줄 것인지 묻는 작업이다. "권한 밖이어서 도와줄 수 없다" 혹은 "내 선에서 도와줄 수 없다"는 말들에서 책임 회피와 외면이 느껴져서다. 도와주지 않을 수 있는 권력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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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toes are free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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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2009년 영국 유학 시절, 통장 계좌를 만들려고 은행에 갔는데 자꾸 다른 서류를 가져오라고 하더라. 은행 직원이 'My hands are tied'라고 하는데 유학생을 도와줄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다"며 "정말 도와주고 싶으면 손이 아니라 발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 있는게 아닐까. 그 때의 복잡미묘한 기분이 발로 하는 실험의 촉매제가 됐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에서 그의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발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상상해봤다. 간단한 물건을 이동시킬 수는 있어도 컴퓨터나 휴대폰 키보드를 치면서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두 손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두 손이 없는 사람들의 불편한 삶도 떠올리게 된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시간'이 바로 작가의 의도다. 코로나19가 불러온 혼돈의 시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소통, 희생을 역설한다.

"만약 두 팔이 없는 장애인이라면 발로 무엇을 할 수 있을 지 생각해봤어요. 발레리나 출신 현대무용수에게 어떤 동작을 할 지 미리 알려주지 않고 촬영을 했죠. 다만 뜨거운 차를 따르는 위험한 동작은 연습 과정을 거쳤어요. 장애인을 대할 때도 '못한다'는 말 대신 '조금 느릴 뿐' 등 다른 인식으로 접근해야겠다는 깨달음을 '몸소' 느꼈어요. 전시장에 걸린 주황색 그림 3점은 제 발로 직접 그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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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toes are free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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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17년부터 3년 동안 서울 중구 장애인복지관과 토탈미술관의 공동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발달장애아들과 함께 티셔츠와 유리컵을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소통의 방법을 고민하게 됐다고.

그는 "처음에 너무 조심스럽고 아이들이 뭘 좋아하는지 대화로 찾아내는게 참 어려웠다"며 "다음에는 아이들과 오렌지색을 만드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각자 다채로운 오렌지색을 보여줄 것 같다"고 말했다.

작가는 사물에 페인트칠을 해서 뚝뚝 흘러내리는 사진 작품 시리즈 'Meltdown(멜트다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에 완전히 다른 작업을 선보인 배경에 대해 "설명 과정을 줄이고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전시는 31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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