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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세상사는 이야기] 어느 노부부의 너무 큰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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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며칠 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너무 놀라 귀를 의심하며 한나절을 보냈다.

그 이틀 전 일요일, 오랜만에 찾아온 제자와 내가 지키는 서원 근처를 거닐다가 산자락까지 가게 된 일이 있었다. 아득히 먼 곳까지 조망이 되는 곳이라 가끔씩 내가 혼자 가서 숨 돌리곤 하는 곳이었다. 마침 선해 보이는 노부부가 일을 하다가 쉬고 계시길래 땅 주인이시냐고 여쭈면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오가는 길에 서원에 들러 물이라도 들고 가시라고 하며 헤어졌다.

그런데 그 다음날 두 분이 정말로 들르셨다. 마침 볼 일이 있어 그 조금 전 서원을 나섰던 나는, 노인들이 어려운 걸음 하신 것이라, 얼른 차를 돌려 돌아왔다. 차 한 잔을 드리고 서원 안내도 조금 하며 한 반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원의 좋은 물을 좋아 하시길래 오가실 때 혹시 문이 닫혔더라도 들어오셔서 물 받아가시라고 대문 여는 법을 알려드리고 전송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이른 아침 전화가 온 것이다. 그 산자락의 땅을 서원에 희사하고 싶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어디서나 그렇지만, 농촌에 있어 보면 사람들이 땅에 대해서는, 경계 하나를 두고 얼마나 민감한지, 한 치 땅을 두고 심하게 다투는 걸 자주 본다. 땅의 쾌척이란 있을 수 없는 얘기이다.)

그런데 잠깐 뵌 그 분들께 내가, 내 꿈이나 장래 계획까지 이야기했을 리는 없지만 사실 나는 이즈음, 오랜 세월 품어온, 꿈으로 그칠 줄 안 꿈이 뜻밖에도 실현될 듯한 조짐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는 참이다. 젊은이들에게 격려가 되고 꿈을 품게 하는 곳, 우리의 전통과 세계를 잇는 격조와 내실이 있는 학문과 예술과 문화의 터를 오랜 세월 생각해왔고. 여백 서원도 그렇게 세워졌다. 나는 책이나 볼 줄 알 뿐 생래적으로 어디 손 벌릴 줄 모르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인데 지금까지 혼자 손으로 어찌어찌 되어왔다. 내 뜻을 가상히 여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5인분 노비"로 부를 만큼의 공이 들어가긴 했다. 서원을 찾는 이들의 뜻과 도움도 있었다.

찾는 사람들이 다들 좋아해서, 꿈이 근년에 한 걸음 더 나갔다. 작은 마을의 꿈으로 확대된 것. 한 사람이 얼마큼 커갈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자신을 어떻게 키워갔는가를 젊은이들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싶다. 그런데 최근, 그 기초를 놓아주시겠다는 분, 집을 지어주시겠다는 분이 잇달아 나타난 것이다. 사실 지난 일요일에 제자와 그곳까지 간 것도 앞으로 조성될 그 '괴테 마을'의 터를 보여주다가 조금 시간 여유가 있어, 그 산자락 땅까지 간 것이다. 저기에 별을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천문대가 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던 곳인데 천 평도 넘는 그 땅을 살 생각까지 할 수야 없었다. 그런데 이제 노부부의 희사 덕분에 언젠가, 작은 천문대와 책 오두막들이 모인 동네 한 켠까지 실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도 믿어지지는 않지만.

노부부는 전화를 주신 후 한 번 더 다녀가셨다. 어떻게 땅을 주실 생각을 하시느냐고 여쭈었더니, 한때 그 땅을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값을 받고 팔까 하는 궁리를 한 적도 있었으나 이제 생각하니 거처할 집도 없지 않은 만큼 보람 있게 쓰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리 결정하셨단다. 짧은 시간 보셨으나 서원에서나 사람에서나 좋은 뜻을 읽으셨다면서. 그 밖에도 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소박하건만 그야말로 인생의 지혜가 묻어났다. -내가 궁금해서 무슨 일 하며 사셨냐고 여쭈었더니 안 해본 일이 없다면서 웃으신다. 몸 가벼워 보이는 단단한 체구, 주름진 구릿빛 피부가 그 말을 온전히 뒷받침했다.

후덕하신 아내 분이 떠나며, 슬며시 그 땅 뭐 하냐며 당신이 남편 옆구리를 찌르셨다고 해서(아니 지금 연세가 얼마인데 옆구리 찌르는 사이인가 싶어^^) 연세를 여쭈었다. 당신은 78세, 어르신은 79세였다. 게이트볼 치다가 만나셨다는데 결혼 3년차 신혼이었다! 분명 오래 혼자 지내셨을 분들이 말년을 그렇게 함께하시는 게 얼마나 보기 좋던지. 그 많은 땅을 주시겠다는 분이, 잠깐 차 한 잔 드시면서 내 시간 뺏었다고 미안해 하시며 떠나셨다. 오래 서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참 아름다웠다.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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