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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이슈 성착취물 실태와 수사

'n번방·박사방'의 신상공개 기준은…성착취물 제작 가담자는 '공개’, 매수자는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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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자 신상공개 여부 살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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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진인 '박사' 조주빈 씨가 수감된 서울 종로경찰서.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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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텔레그램’에서 성 착취물을 제작·유포한 사건과 관련된 인물의 신상공개가 이어지고 있다. 일부 피의자는 경찰이 요청한 신상공개를 법원이 거부하기도 한다. 성범죄자는 어떤 기준으로 신상을 공개할까.

성범죄자 신상공개를 규정한 법령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 특례법) 25조다. 이 조항은 ‘성폭력범죄 피의자가 죄를 범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고, 국민의 알 권리 보장, 피의자의 재범 방지와 범죄예방 등 공공이익을 위해 필요할 때에는 얼굴·성명·나이 등 피의자 신상 정보를 공개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지난해까지 이 조항을 실제로 적용한 적은 없었다. 사문화한 조항을 현실에 적용한 건 지난해부터 사회적 문제로 집중적으로 부각한 이른바 n번방·박사방 사건 때문이다. 텔레그램 메신저를 통해 성 착취 사진과 피해자 신상정보를 공유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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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만명의 동의를 얻은 텔레그램 용의자 신상공개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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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이익·중대범죄·증거 충분시 신상공개

두 사건을 계기로 경찰이 성 착취 혐의자 신상을 줄줄이 공개하기 시작했다. 지난 3월 24일 서울지방경찰청 신상공개심의위원회는 성착취범 조주빈(24)에 대한 신상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조 씨는 텔레그램에서 닉네임 ‘박사’라는 이름으로 박사방을 운영한 인물이다. 조 씨는 성폭력처벌 특레법에 따라 신상을 공개한 첫 번째 성범죄 피의자다.

4월에는 조주빈을 도와 박사방 운영과 성착취물 유포에 관여한 인물의 신상을 공개했다. 닉네임 ‘부따’ 강훈(18)과 닉네임 ‘이기야’ 이원호(19) 육군 일병이다.

n번방을 최초로 만들어 닉네임 ‘갓갓’으로 활동한 혐의를 받는 문형욱(24)의 신상도 5월 공개했다. 6월에는 문 씨의 공범인 안승진(25)의 신상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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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착취물 범죄자 신상공개 여부. 그래픽 김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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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명의 신상을 경찰이 공개한 이유는 대체로 비슷하다. ▶영상물을 제작·유포한 범행 수법이 악질적·반복적이고 ▶아동·청소년을 포함해 피해자가 무려 70여명에 이르고 ▶인적·물적 증거가 충분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경찰청에 따르면 성범죄자 신상정보 공개 여부를 결정하는 구체적 절차를 규정한 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경찰은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특정강력범죄법) 관련 규정을 준용해 성범죄자 신상 공개 여부를 결정한다. 특정강력범죄법 8조의 2(피의자의 얼굴 등 공개)는 ▶신상정보 공개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고 ▶범죄로 인한 피해가 중대하거나 잔인하며 ▶범행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충분한 경우 신상 공개가 가능토록 규정한다.

신상공개를 위한 객관적 조건을 만족하면 신상정보공개위원회가 열린다. 신상정보공개위원회는 경찰관 3명과 변호사·대학교수 등 외부 위원 4명으로 구성한다. 위원 7명이 신상정보 공개를 결정하면 피의자가 경찰관서에서 출입·이동할 때 얼굴을 모자·마스크로 가리지 않는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신상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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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착취물을 제작 및 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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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 7명이 신상 정보 공개 여부 결정

조주빈의 공범 남경읍(29)은 범죄단체가입·활동 혐의를 적용하지 않았는데도 신상을 공개한 경우다. 검찰에 따르면 남경읍은 지난 2월부터 3월까지 박사방 유료회원으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성폭력처벌법 위반·강요·협박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범죄단체가입·활동 혐의는 추가로 조사하고 있다. 성범죄를 저지른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는 점이 증명되지 않더라도 신상은 공개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닉네임 ‘영강’으로 미성년자 성을 제작·유포한 혐의를 받는 배준환(37)도 역시 신상을 공개한 경우다. 그는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서 주로 활동하며 미성년자 44명을 상대로 성 착취물 1293개를 제작하고 88개를 음란 사이트에 유포한 혐의를 받고 있다. n번방·박사방처럼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른 직접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신상을 공개할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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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이용 성착취물 제작 범죄로 신상이 공개된 배준환(37)이 제주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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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경찰의 신상정보 공개 요청을 법원이 거부한 사례도 있다. 강원지방경찰청 신상공개위원회는 n번방에서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을 구매한 A(38) 씨의 신상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춘천지법 행정1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상공개 집행을 정지해달라"는 A씨의 신청을 인용했다.

법원이 다른 성범죄자와 차이점으로 든 건 강간이 아닌 성 매수 범죄 사실만 입증됐다는 점이다. 앞서 경찰 수사 단계에선 강간·유사강간이 A씨의 핵심 혐의였다. 하지만 춘천지검은 핵심혐의에 대해 ‘혐의없음’ 처분을 내렸다. 미성년자 성 매수 범죄사실 중 일부만 입증된다고 판단했다.

결국 성을 단순히 구매했다거나, 미성년자에게 돈을 주고 성관계 장면을 (유포하지 않고) 촬영한 경우에는 성범죄자라도 신상이 공개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른 7명의 성범죄자와 달리 A씨가 신상 공개를 피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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