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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월)

[이혜운 기자의 영화를 맛보다] 한반도에 종말이 왔을 때… 그가 선택한 마지막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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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의 조니워커 블랙

조선일보

※이 글엔 영화 '반도'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폭우로) 흐르는 강물을 가르며 출근하는 언니를 보니, 좀비가 나와도 한국 직장인들은 회사를 가겠구나." 이 글 밑에 댓글이 달렸다. "좀비 피해 다니는 시간까지 생각해서 평소보다 3~4시간 일찍 출발할 듯." 최근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글이다.

한반도에 좀비 떼가 창궐한다면? 누군가는 약탈하고, 누군가는 약자를 괴롭히며, 누군가는 가족을 지키고, 누군가는 타인을 위해 희생한다. 그리고 영화 '반도'의 서 대위(구교환)는 위스키를 마신다. 어떻게 보면 서 대위는 영화에서 가장 마음이 여린 사람이다.

공식적 직함은 631부대 지휘관이자 리더로 서열 1위지만 그는 권력을 누리고 싶은 생각이 없다. 부대 내 잔혹 게임 '숨바꼭질(좀비 피하기)'에도 관심 없고, 뭘 먹지도 않는다. 영화 속 첫 등장도 지쳐버린 몰골. 그는 스코틀랜드 싱글몰트 위스키 '글렌피딕 15년산'을 마지막으로 마신 뒤 입에 총을 문다.

조선일보

영화 ‘반도’에서 조니워커 블랙을 앞에 두고 황 중사와 대치 중인 서 대위의 모습. /NEW


그의 결행을 막은 건 다리 하나를 잃은 부하 김 이병. 그가 부식 창고에서 빼돌린 영국 블렌디드 위스키 '조니워커 블랙'〈작은 사진〉을 상납하자 그는 감동하며 "내가 (글렌피딕) 마지막 잔 먹고 있었거든요. 저 이런 거 받는 사람 아닌데…"라며 한잔 마신다. 글렌피딕을 다 마셨을 때 마감하려 했던 삶을 조니워커가 연장해준 셈이다.

글렌피딕 15년산은 부드러운 캐러멜 향, 바닐라 향, 알싸한 향이 특징이다. 글렌피딕은 사슴 계곡이라는 뜻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싱글몰트(단일 품종) 위스키다. 반면, 조니워커 블랙은 싱글몰트 위스키 40개 이상을 섞어 만든 것으로 스모키한 향 속에 달콤함과 매콤함이 같이 느껴진다. 폐허가 된 땅에서 겨우 구해 마시는 위스키지만, 제대로 된 순서로 마시게 된 셈이다.

이 조니워커 블랙은 영화 후반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위성 전화를 찾아 홍콩으로 탈출하려는 서 대위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 챈 부대의 실질적 권력 황 중사가 갑자기 서 대위의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그가 건넨 조니워커 블랙 한잔에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것이다. '그가 나에게 이 술을 나눠줄 리 없다'며! 황 중사는 애주가 서 대위에게 술은 목숨만큼 소중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혜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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