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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식민지배 성찰없는 아베, 합의 뒤집은 文...한일관계 파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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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한일지식인공동성명 주도한 와다 하루키 김영호 교수 대담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은 2010년, 한·일 지식인 1000여명이 공동성명을 냈다. ‘한국 병합은 불의부정한 행위였고, 조약 체결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처음부터 원천무효라는 전례없는 선언이었다. 일본측에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일본측 위원장을 지낸 미타니 다이치로(三谷太一郞) 도쿄대 명예교수, 사카모토 요시카즈(坂本義和) 도쿄대 명예교수, 미야자키 이사무(宮岐勇) 전 일본 경제기획청 장관 등 531명이 참여했다. 한국측은 김진현 전 서울시립대총장, 이태진·백낙청·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작가 김지하·이문열씨 등 587명이 선언에 참여했다. 두나라의 대표적 보수·진보 지식인들이 대거 나선 것이다.

한일 지식인선언은 그해 8월 ‘식민지배가 한국인들의 의사에 반(反)해 이뤄졌다’는 내용의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 담화를 이끌어냈다. 병합의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던 역대 일본 정부의 태도에서 진일보한 선언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듬해 궁내청 소장 조선왕실의궤 등 일제때 반출한 도서 1200책을 돌려주기도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한일 관계는 빙하기를 맞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위안부 합의 파기,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과 일본기업 자산압류,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 조치 등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혐한(嫌韓), 반일(反日) 분위기가 거세다. 10년 전 한일지식인선언을 주도한 와다 하루키(82) 도쿄대 명예교수와 김영호(80) 경북대 명예교수가 지난 주말 전화와 이메일로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 현안을 진단하고 출구를 모색하는 대담을 가졌다.

◇‘강제병합은 원천 무효’ 한일 지식인성명
조선일보

2010년 한일지식인 공동성명을 주도한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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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동아시아가 150여년간 서양화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며 가해국과 피해국 지식인이 과거사의 그늘에서 벗어나 미래로 향하기 위해 공동성명을 내놓아 반향이 컸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처음부터 불법무효였다는 선언에 일본 주류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하는 데는 와다 선생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와다 하루키 “김영호 교수와 이태진 교수를 비롯한 한국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나섰기에 가능했다. 가해국과 피해국 지식인들이 과거사를 놓고 합의할 수있다는 게 희망을 줬다.”

김영호 “간 나오토 일본 총리까지 한일 지식인선언에 호응해 담화를 내놨다. 무라야마 담화(1995) 김대중·오부치 한일 파트너십 선언(1998) 고이즈미·김정일 평양선언(2002) 등 앞선 선언과 비교하면 어떻게 평가할수 있을까.”

와다 하루키 “무라야마 담화는 전후 일본이 처음으로 ‘아시아 제국의 사람들에게’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음을 시인하고,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마음을 표명’했다. 전후 일본이 표명한 획기적인 사죄였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한국사람들’에게, 2002년 김정일·고이즈미 선언은 ‘조선사람들’에게 사죄를 표명했다. 하지만 한국병합 그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가 필요했다. 간 나오토 총리는 내각회의를 거쳐 2010년 8월10일 담화를 발표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하여 이루어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나라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식민지지배가 초래한 다대한 손해와 아픔에 대해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했다. 우리가 발표한 지식인 공동성명에 가장 근접한 담화였다.”

김영호 “간 나오토 담화는 한일 지식인공동성명이 낳은 성과이고 지금 대법원의 징용 판결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이육사의 시 ‘광야’)고 생각한다. 지금 일본 총리 관저 홈페이지엔 이 담화가 삭제됐다고 한다. 각의(閣議)를 거친 공식담화를 마음대로 빼도 되나. 한국에서도 간 나오토 담화를 중시하지 않는 분위기다. 간 나오토 담화실종사건이라 할까.”

‘한일 관계 파탄 주범’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조선일보

2010년 한일지식인공동성명을 주도한 김영호 경북대 명예교수. 근대 한일 경제사 연구자로 김대중 정부 때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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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하루키 “한일지식인선언과 간 나오토 담화는 일본보다 한국에서 훨씬 비중있게 보도됐다. 헌법재판소는 2011년 위안부 소송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정부의 부작위(不作爲)는 위헌이라고 판결했고, 2018년 대법원은 일본 기업의 강제동원에 대해 배상 판결을 내렸다. 한일 지식인성명과 간 나오토 담화가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김영호 “그런 의견이 나오고 있다. 2009년 한국 고등법원은 강제동원피해 항고심에서 일본 최고재판소의 원고패소 판결(2007년)을 그대로 승인해 판결을 내렸다. 이렇듯 한국 법원은 강제동원에 대한 일본의 배상책임인정에 다소 소극적이었다. 지식인공동성명에서 일본의 한국병합조약 자체가 불법 무효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식민통치의 성격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2011년의 헌법재판소 판결이나 2012년 대법원 판결이 바뀐 게 아닌가 싶다. 이 때문에 지식인선언이 한일관계를 악화시켰다는 원망도 듣는다.”

와다 하루키 “일본 보수단체에선 나를 지목하며 지식인 공동성명이 일·한관계를 악화시킨 주범이라는 험악한 표현이 나온지 오래다. 하지만 공동선언은 우리가 아니라도 누군가 꼭 했어야 할 일이었다. 한일관계가 악화된 데는 이것말고 다른 요인도 많았으니, 자책할 필요까진 없다.”

김영호 “지금 한일관계는 최악이라고 할 수있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일본 지식인들이 10년전처럼 공동성명에 대거 참여할 수있을까 싶을 정도다.”

와다 하루키 “분위기도 너무 바뀌었고 그간 돌아가신 분도 3분의 1이 넘는다. 그때처럼 많은 숫자가 참여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공동성명에 참여한 지식인들은 학문적 신념에서 나섰기 때문에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김영호 “한일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간 책임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한국인들은 아베 정부가 역대 일본 총리가 어렵사리 내놓은 위안부 문제와 징용 문제 등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이어가지않는 데 대해 분노한다.”

와다 하루키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뒤집은 것은 문제라고 얘기해왔다. 양국 정부가 한 합의는 좀 부족하더라도 지켰어야 했는데 아쉽다. 일본에선 위안부 합의 파기로 한국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무덤 위에 피묻은 깃대를 세운’ 셈

김영호 “작년 만해평화상을 수상한 걸 다시 축하드린다. 만해 한용운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타고르의 시 ‘원정’(園丁)을 읽고 ‘무덤 위에 피묻은 깃대를 세우셔요’ 라고 썼다. 타고르에게 무덤 앞에서 추념만 하지말고 무덤 위에 피묻은 깃대를 세워 뛰어넘어가라고 한 시다. 고종·순종도 한국 병합조약에 서명한 적이 없으니 원천무효를 위해 싸우라고 유언을 남겼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들도 을사보호조약 무효를 주장하며 사투를 벌였다. 2·8 독립선언서와 3·1독립선언서는 한국병합조약 무효를 주장했고,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청원서의 핵심내용도 을사보호조약과 병합조약의 원천적 무효였다. 한일 지식인공동성명은 ‘무덤 위에 피묻은 깃대를 세운’셈이다.”

와다 하루키 “만해 선생의 타고르 비판 관점이 참 좋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평화를 위한 영속적 혁명정신이 잘 드러나있다.”
조선일보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발기인들이 2015년 7월 2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역사 인식을 비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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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아베 총리는 한일 두나라 지식인들이 함께 한 공동성명을 거꾸로 되돌렸다. 아베의 역풍이 노리는 ‘65년 체제’ 고수와 한일 지식인공동성명의 신(新)한일체제는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을까. 지식인 공동성명은 한일기본조약 제2조(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의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를 ‘당초부터 무효로 한다’로 보는 한국 측의 해석을 받아들이라는 일종의 해석개정 아닌가.”

와다 하루키 “해석 개정이라는 점에서 보면 신(新)한일체제이지만, 조문은 개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65년 체제’다. 문제는 아베 정권과 문재인 정권은 이미 타협불가능한 견원지간이란 점이다. 아베 정권은 이미 코로나 대응실패로 식물정부에 가깝다. 앞으로 지지율이 회복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평화헌법을 바꾸는 개헌도 물건너갔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전략이다. 신일본제철은 아베 정부의 의도에서 벗어나 한국 법원의 자산압류조치에 대해 항고했다. 이것은 이미 한국 대법원의 프로세스에 옮겨탔다는 이야기다. 이대로 가면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당사자 해결에 맡기는 것이 된다.”

아베정권과 문재인 정권은 견원지간

김영호 “2010년 한일 지식인공동성명은 2015 년 놈 촘스키 미국 MIT대교수, 알렉시스 더든 미국 코네티컷대 교수 등 세계 지식인 500인의 지지성명도 받았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 때 나온 한일시민평화선언에도 지지표현이 들어있다. 프랑스 국제법학자 프란시스 레이 교수는 1906년 강압에 의한 대표적 국제조약으로 을사보호조약을 들고 무효를 주장했다. 이태진 교수는 1935년 국제연맹, 1963년 UN총회에서 을사보호조약을 무효로 인정한 사실을 밝혔다. 와다 선생의 최근작 ‘한국병합 110년만의 진실’은 병합과정의 진실을 통렬하게 파헤쳤다. 지식인 공동성명의 근거가 더욱 확실해진 셈이다. 아베 정부의 반동에 저항하는 일본 시민들의 힘을 기대할수 있을까.”

와다 하루키 “시민들의 저항은 이미 시작됐다. 아베 지지율의 폭락이 그 증거다.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시민들의 자신감도 부쩍 증가했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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