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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저자와의 대화] 책을 편집한다는 건, 세상을 재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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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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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마다 원칙은 조금씩 다르지만, 책을 만든 편집자 이름은 책에 잘 등장하지 않는다. 나오더라도 지은이 이름에 묻히는 일이 일반적이다.

커튼 뒤의 무관(無冠)인 편집자는, 그러나 책의 만듦새를 총괄하는 사람이다. 표지부터 책등까지, 보이지도 않는 오탈자에 마침표 하나까지, 전부 편집자의 거룩한 권한이자 동시에 천근만근의 책임이다. 1985년, 출판사에 입사해 외길을 걸은 편집자가 있다. 단행본 편집만 35년, 2000년 설립한 마음산책 20주년을 맞은 정은숙 대표(58)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최근 만났다.

정 대표는 20돌을 기념해 1년간 전국을 돌며 20인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를 만나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을 냈다. 한껏 잘 차려낸 '말'의 성찬, 왜 성년의 생일에 인터뷰집이었을까.

"글은 집필을 통해 남지만 말은 남지 않잖아요. 사상과 세계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말'의 기록은 중요한 텍스트입니다. 수전 손택부터 아녜스 바르다까지, 14권을 낸 '말(言) 시리즈' 영향도 받았고요. 잘 할 수 있는 것, 물을 수 있는 것, 애써 배웠던 것으로 '우리'를 기념하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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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의 삶에 집중하되, 책과 글에 관한 호흡이 그득하다. 신형철 평론가와 "가장 위대한 글은 지금 구상 중인 글"이라며 글의 본령을 이야기하고, 김숨 작가와 "내가 쓴 소설들이 나를 전환시켰다"며 글의 힘을 주제로 대화한다. 위대한 책, 책을 통한 변화란 뭘까.

"카프카의 은유처럼 위대한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로서의 자각(自覺)일 수도 있겠지만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 글이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책은 매 순간 편집자가 결정하는 최선의 선택의 조합이잖아요. 그렇다고 항상 최고의 결과만 나오진 않죠. 하지만 반성하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 반성과 진일보가 책을 통한 변화인 것 같아요."

마음산책의 출발은 2000년 여름으로 돌아간다. 홍성사 편집자, 세계사 편집장, 열림원 주간을 거친 '편집자 정은숙'은 그해 8월 출판사를 세워 독립했다. 첫 책은 김영하 작가의 영화산문집 '굴비낚시'였다. 신예였던 김 작가는 '써뒀던 잡문을 그러모으는' 대신 '전작(全作)을 새로 쓰는' 글을 정 대표에게 요청받았다. 초판만 5000부를 찍었다.

"기억에 남는 세 권을 꼽는다면, 우선 '굴비낚시'예요. 마음산책을 많이 알린 책이어서 마음이 쏠려요. 박찬욱 감독의 2005년작 '박찬욱의 오마주·몽타주' 2권 세트도 글맛이 생생한 책이었고요. 이기호 작가의 경장편 소설집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다'는 문학장에 새로운 독자를 불러들인 책이에요. 웃음 끝에 '찡함'이 묻어나죠."

요즘 정 대표의 생각은 "책의 편집은 세상의 재편"이라는 깨달음에 가닿았다. 누구나 저자가 될 수 있는 시대라는 고민과도 맞닿는다.

"커피 한 잔 마실 시간인 5분 만에 책을 인쇄해주는 '에스프레소 북 머신'까지 출시됐어요. 편집자 정체성이 흔들리죠.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요. 편집자는 저자에서 시작해 독자에게 이르기까지 콘셉트를 정하고 의미를 가공해 전달하는 사람이에요. 동일한 원고도 편집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죠. 따라서 책을 편집한다는 건 세상을 편집하는 일과 같아요. 세상을 재편한다는 희망으로 만들죠."

이직도 퇴사도 잦은 출판사 편집자라는 직종, 편집자로서 그가 꼽는 '재능'은 뭘까.

"균형감각이겠죠. 편집자도 독자인지라 작가의 조어(造語)나 비문까지 사랑하고야 마는 순간이 꼭 있어요. 편집자는 거기까지 가버리면 안 돼요. 독자에게 이해가 어렵지는 않은지를 늘 살펴야죠. 그렇다고 작가의 개성을 너무 허물어서도 안 되고요. 그저 작가는 그냥 '이상한' 글을 계속 쓰고 있으면 됩니다. 편집자는 그를 대신해 '이상한' 글이 세상에 놓일 자리를 알아야 해요. 균형을 통해서요."

이제 시를 쓰지 않는다지만, 정 대표는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해 몇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침대 머리 맡엔 늘 이성복 시론집 '극지의 시'가 놓여 있다.

"이성복 시인 책은 제 삶의 산상수훈이에요. '시가 놀게 하라'는 글이 와닿아서인데, 삶도 그렇잖아요.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삶이 삶이도록 놔둘 때 살아지는 것 같아요. 편집자로서 제게는 제가 만든 한 권의 책이 한 편의 시 쓰기와 같았어요. 이제 시를 쓰지 않지만 책으로 시를 쓴다는 마음으로 살아왔거든요. 시인이 시를 사는(生) 것처럼, 편집자는 책을 사는(生) 거랄까."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인터뷰 전문(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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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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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출판사 20주년의 기념 출간책 형식이 '인터뷰집' 이었을까요.

'수전 손택의 말' 이후 최근 출간된 '아녜스 바르다의 말'까지, '말' 시리즈로 14권을 출간했다. '수전 손택의 말'을 만들면서 출판의 새로운 물성을 느꼈다. 사상가나 문학가의 인터뷰는 어떤 텍스트보다 중요하다. 사상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어서다. 사상가들은 대개 글과 말이 위배되지 않는다.

말이라는 것은 매혹적이다. 말은 사라진다. 글은 집필을 통해 남지만 말은 글로 옮기지 않는다면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어렵게 느껴지는 저자의 철학이나 문학 등에 관한 '말'은 하나의 문제제기이기지만 독자 입장에서 잘 읽히기도 한다.

마음산책 20주년을 기념하면서 정말 특별한 책, 어떤 성격의 책을 쓸 것인지를 1년 전부터 고민하다가 '말의 중요성'에 집중했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 물을 수 있는 것, 그간 배웠던 것을 쓰기로 했고 그래서 20인의 인터뷰집을 출간하기로 했다.

2. 지금까지 낸 책의 종수가 약 420권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있겠느냐만 지금까지 펴낸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3권만 꼽아주신다면.

마음산책 출판사를 2000년 8월 16일에 설립했다. 그해 10월 5일 첫 책으로 출간한 김영하 작가님의 '굴비낚시'를 잊을 수 없다. 젊은 작가의 산문, 게다가 영화로 주제로 한 책이어서 상징성이 높은 책이었다. 문학 창작이 아닌 산문을, 그것도 이미 써뒀던 잡문을 끌어모으지 않고 전작을 새로 쓰게 하는 콘셉트의 영화산문이었다.

당시 김 작가는 첫 창작집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신예인데도 화제성이 높았다. 문학상 시상대 올라가는데 당시에도 파격이었던 귀걸이를 착용할 정도였다. 게다가 말도 반듯하게 하고, 좌중 앞에서도 달변을 하는 젊은 소설가였다. 그리고 글의 힘이 남달랐다. 첫 책인데 5000부를 찍었다. 마음산책을 알린 책이었다.

아울러 박찬욱 감독님의 '박찬욱의 오마주'와 '박찬욱의 몽타주'를 꼽겠다. 새로운 출판사로서의 개성을 형성한 책이었다. 도록이나 딱딱한 제작기가 아니라 글맛이 살아 있는 예술서로서의 창작집이었다. 당시 두 책을 통해 세트의 의미를 깨달았다. '오마주'는 평론집인 데다 내용이 다소 어려워서 '몽타주'만 많이 찾으실 거라고 예상했는데 저의 예상과 달리 세트로만 2만 질이 판매됐다. 출판사가 책을 세트화(化)한다는 의미를 깊게 느낀 계기였다.

세 번째 책은 이기호 작가의 소설집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다'를 꼽겠다. 10만부를 찍었다. 문학 독자가 아닌 분들도 이 책을 찾으셨다. 취업준비생이나 주부 등이 나오는 짧은 에피소드를 자신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공감대를 형성한 책이다. 웃음 끝에 '찡함'이 있는 책이랄까. 기존 문학 독자가 아니더라도 짧은 소설로 문학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책이었다.

3. 이번 책 '스무 해의 폴짝'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인터뷰마다 작가분들께 운동화를 선물하셨습니다. 왜 운동화를 선물하신 걸까요.

처음에는 책의 제목을 '스무 살의 폴짝'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경우 마음산책이 주인공이 되더라. 단순히 우리의 20년을 돌아보는 게 아니라, 스무 해를 같이 걸어온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눠 '우리 모두의 스무 해'가 되길 바랐다. '스무 해의 폴짝'으로 제목을 정한 뒤 도약대를 생각하다 운동화가 생각났다. '떡 돌리듯이' 드린 게 운동화였다. (웃음)

인터뷰 이틀 전에 연락 나눠서 신발을 드렸고 선물을 드린 후 '언박싱'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신형철 평론가는 캠퍼 스니커즈, 이기호 소설가는 아디다스 스타워즈 한정판 운동화, 김금희 소설가는 나이키 핑크색 운동화, 김소연 시인은 뉴발란스 밝은 녹색 운동화였다. 특히 이기호 작가는 아들과 신발 사이즈가 비슷한데 절대로 빼앗기면 안 된다고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 임경선 소설가는 선물받은 아디다스 러닝화로 운동하는 데 처음 신었다고 연락을 받았다.

4. 책의 내부로 들어가 볼게요. 인터뷰집에서 대표님께서 해당 작가에게 던진 질문 혹은 해당 작가가 대표님께 드린 대답을 토대로, 대표님께 역(逆)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신형철 평론가 인터뷰에서 "가장 위대한 글은 지금 구상 중인 글"이라는 문장을 읽었습니다. 이를 빌려 질문한다면 대표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위대한 글'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마음에 남는 글은 카프카의 말처럼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일 수도 있고 또 큰 자각이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글도 있을 테지만 제게 좋은 글은 '마음을 건드려서 그대로 남는, 사라지지 않는 글'인 것 같다. 마음산책의 정체성에도 가닿는 주제다.

5. 김숨 소설가와의 인터뷰 제목인 "내가 쓴 소설들이 나를 전환시켰어요"라는 글을 기억합니다. 책을 통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소설 한 편을 쓰면 그 소설 한 편을 통과한 나는 다른 사람이 돼 있다"는 어떤 소설가의 글도 기억해봅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책의 본질적인 물성은 '변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는데, 대표님께서 만든 책은 대표님을 변화시켰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아니, 그 정도가 아니고, 책은 저를 살게 했다. 책을 안 만들었다면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살게 하는 유일한 힘이었다.

시골도시의 자폐적인 아이, 그게 저였다. 손님이 오면 다락방에서 잘 내려가지도 않을 정도였다. 다락방에서 공무원이셨던 아버지 영향으로 잡지 '새마을'부터 어른들과 언니 오빠가 읽은 책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 읽었다. 책을 통해 세상을 배웠고 책 가까이에 있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했고 효용이 있는 글쓰기를 하고 살리라 생각했다.

첫 직장은 출판사 홍성사가 발행하는 잡지 '꿈과 일터'의 기자직이었다. 졸업하던 달에 들어갔고 그해가 1985년 2월이었다. 그러나 잡지가 얼마 되지 않아 폐간됐다. 단행본 파트로 발령이 났다. 직접 작가를 만나니까 단행본을 만드는 일은 마치 '뿌리를 만지는' 느낌이었다. 단행본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내가 꿈꿨던 모든 게 실현되는 기분이었다. 이후 한 번도 안 쉬었는데, 질리지도 않고 매번 놀랍게 세상을 만났다.

마음산책의 20년을 넘어 홍성사, 세계사, 열림원 시절까지 합치면 아마도 1300~1400종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편집했다. 항상 책을 만들고 나면 느끼는 것이지만 모든 책은 모든 최선의 선택의 조합이다. 타이포부터 제목과 책 크기 등 그때 편집자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 책으로 조합된다. 그렇다고 항상 최고의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다. 상상한 책이 완성됐을 때의 물성은 편집자만의 것인데 '이거였구나'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게 아니었구나' 하는 기분도 분명하다. 최고가 아니라 하더라도 후회하는 건 아니다. 반성할 뿐이다. 최선의 선택에서 조금 실패한 것들이 저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변화라고 한다면 그게 변화가 아닐까. 그 매번의 실망과 기분 좋음 사이에서 실패하더라도 반성하며 변화한다.

6. 출판사 대표이시지만 늘 정체성은 '편집자'라고 말씀하시죠. 직업으로서의 편집자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책의 편집은 세상을 편집하는 일이다. 책을 편집하며 세상을 편집한다. 같은 원고도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다른 형태로 책을 내게 되는데 이는 세상을 재편하며 출판하기 때문이다. 가상의 독자를 위해 책을 만들지만 그 독자가 변화될 모습을 상상하며 책을 낸다. 그러므로 편집자는 세상을 편집하는 직무다.

이제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유럽의 '에스프레소 머신'은 원고를 넣으면 기념품으로 책이 출간된다.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시는 사이에 자신의 책이 완성된다는 얘기다. 그런 시대에 편집자 역할은 무얼까. 편집자는 저자 원고에서 시작해 독자라는 도착지에 이르기까지 콘셉트를 정하고 신념을 반영하고 의미를 가공해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원고를 독자에게 건네주기 전까지 저자 마음을 기술적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을 조금씩 움직이는 역할을 맡는다. 독자를 상상하고 체제를 갖추는, 마음에 관계되는 일이 바로 편집자다.

그러므로 정리하자면, 편집자는 저자 마음을 움직여 독자 마음을 사는 사람이다.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지만 책은 생물이어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책은 생물이다. 생물로서 살아가게 책으로 내놓는 것, 세상을 재편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책을 만들어야 한다. 이 신념이 없으면 편집자는 의미가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7. 편집자로서의 타고난 재능이라는 게 있을까요.

균형감각이겠다. 좋은 글을 발견하는 일은 균형에서 나온다. 편집자도 독자이기 때문에 작가와 작업을 하다보면 그 작가의 조어나 비문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편집자는 그렇기까지 가버리면 안 된다. 독자가 읽었을 때 이해가 어렵지는 않은지, 다른 문제는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 반대편에서, 작가의 개성을 너무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평범한 문장으로 글을 다듬고 있지는 않은지도 신경을 써야 한다. 독자 친화적이어서도 안 되고 작가 친화적도 안 되는 일이 편집자다.

작가는 그냥 '이상한' 글을 계속 쓰면 된다. 개성 있고 까다로운 글을 작가는 그냥 계속 쓰는 것이다. 타깃인 독자에게 글을 어떻게 전달할지에 관한 고민은 편집자 몫이다. 교정과 교열로 개성을 깎으면서까지 독자가 읽기 편하게 할 것이냐, 반대로 개성을 그대로 살려 마니아 독자에게 가닿을 것이냐.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예민한 상태로 있어야 글이 걸려드는 것 같다. 안 고쳐야 아름다운 책이 되겠구나 혹은 문단을 나누거나 챕터를 나눠야 독자가 수용하기 편하겠구나 등등. 그건 아주 예민한 감각이다.

세상에 놓여지는 맥락을 글을 쓰는 작가는 몰라도 된다. 그냥 쓰면 된다. 대신 편집자는 작가의 '이상한' 글이 세상의 놓일 자리를 알아야 한다. 그걸 편집자가 모르고 내놓는다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8. '이상한 글'이 '세상에 놓일 자리'를 풀어 설명해주신다면.

35년 편집자 경력의 결론은 항상 1년차여야 한다는 것이다. 놓일 자리에 대한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해 왔다. 책을 만드는 자세에서는 35년차인 나나 지금 사무실 앞의 3년차 편집자나 같은 마음이다. 3년차나 35년차나 똑같다. 이게 35년차의 결론이다. 우리는 다들 1년차로서 이야기한다. 항상 1년차처럼 '1대1'처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해보니까 말이야'라는 말은 편집에선 없는 말이다. 기술적인 것의 도움은 될 수 있어도 그 경험이 다가 아니란 걸 편집자들은 안다.

9. 조금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볼까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여행을 갈 때마다 이성복 시인의 '극지의 시'를 가져간다는 내용을 봤습니다. 왜 그 책이었을까요.

이성복 시인의 '극지의 시' '무한화서' '불화하는 말들'은 제 삶의 산상수훈이다. 선물할 일이 있으면 항상 이 책을 조용히 골라 보내드린다.

'시는 시가 놀게 해야 한다, 시가 놀게 하라'는 글이 깊이 와닿았다. 삶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은가. 삶도 내 맘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고, 억울한 일들 혹은 모독을 당했다고 생각되는 일들 때문에 우울한데, 내 삶을 나의 마음대로 한다기보다는 삶이 놀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삶은 원래 모독도 당하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것. 삶이 삶이도록 놔두는 것. 덜컹거리는 언어 하나만 걸리면 남은 것들은 다 털어내고 골격만 남기는 삶. 그런 시적인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책을 만드는 일도 한 권 한 권의 시 쓰기 같다. 마음산책에서 출판한 420여종의 책도 실은 420여 편의 시를 쓰는 과정과도 같았다고 생각해 왔다. 언어를 굴리는 게 시인데, 제목과 형식과 카피까지 뭐든 굴리는 것의 결과물이 시 아닌가. 시를 책으로 쓴다고 생각한다. 한권의 책이 내게는 한 편의 시다. 물론 너무 저자의 책을 내 책처럼 생각하니까 오버하는 것 같지만. (웃음) 그런 묘한 마음으로 책을 만들어 왔다. 책은 저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시인이 시를 사는(生) 것처럼, 편집자는 책을 사는(生) 것이라고 생각한다.

10. 마지막 질문입니다. 뭔가를 쓰는 물리적 장소가 아닌, 쓰고 있는 순간에 보게 되는 풍경을 '골방'이라고 표현하지요. 출판사 편집자에게도 책을 만들고 책을 만지고 책을 넘기며 마주하게 되는 무형의 골방은 존재할 것 같습니다. '편집자 정은숙'의 골방의 풍경은 어떻습니까. 누가 살고 있고, 누가 지나가며, 무엇이 있는지 등등. 골방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책의 물성에 대한 감각으로 설명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상상한 책이 완성돼 가장 먼저 그 책의 독자로서 펼쳐보게 되는 순간의 물성 같은 것. '이거였구나' 혹은 '이건 아니었구나' 하는 그 기분이 아마도 편집자로서의 저의 골방의 풍경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풍경을 은유하자면, 모르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앉아 있다. 뒷모습은 언제나 사랑스럽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앞모습을 제게 보이는 바로 그 순간이 저의 골방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모르는 사람의 등을 툭툭 치고 그의 앞모습을 얼굴을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의 얼굴에서 그 사람의 골방을 확인하는 것. 그게 저의 골방이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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