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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9 (화)

[특파원 리포트] ‘블랙 교칙’을 향해 던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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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한국에 수학여행온 일본 고등학생들./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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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오사카부(府)에서 공립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검은 머리 염색을 강요당해 정신적 피해를 봤다’며 지자체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낸 적이 있다. 날 때부터 갈색이었는데 ‘교칙’ 때문에 염색을 강요받아 등교를 못 할 지경에 이르렀고, 수학여행에서 제외되고 책상이 사라져 학생 취급도 못 받았다는 주장이다.

송사 사실이 보도되면서 파장이 일었다. 이런 교칙을 몰랐던, 또는 자라면서 잊어버렸던 어른들은 놀랐다. 동병상련을 느낀 다른 중·고교생들은 자기 사례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블랙 교칙(校則)’이란 말이 유행했다. 학생들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불합리한 교칙을 이렇게 불렀다. 이후 철폐 운동 단체가 생기고 관련 영화도 나왔다. 하지만 현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속옷은 반드시 흰색으로’라는 교칙이 여전히 학생들을 옥죈다. 교사 검사에 화난 중1 남학생은 “우린 속옷 색을 고를 자유도 없다”고 한탄했다. 양말 접는 횟수를 규정하고 자외선 차단제나 머플러를 금지하는, 이유를 추정하기 어려운 일도 벌어진다. 코로나 시대 ‘흰 마스크 통일’ 지침이 새로 생긴 곳도 있다.

조선일보

지난 달 일본 한 중학생이 소셜미디어에 공개한 자교의 복장 교칙. '양말은 흰색 무늬 없는 것으로 발목 복숭아뼈 위에서 3번 접어 신어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치마 길이, 운동화 색깔, 방한용 스타킹·타이즈 착용 기간과 색깔 등이 교칙으로 규정돼 있다. /트위터


그런데 올가을 들어 달라진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일본 각지 중·고교에서 학생들이 교칙 개정을 위해 회의를 소집하고, 학생 투표를 벌였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학생들 ‘소신’에 언론이 기획 기사를 싣고, 먼저 논의의 장을 열겠다는 학교도 생겼다. 오사카 사건 이후 동질감을 느껴온 학생들의 불만이 임계점을 넘었고, 그들은 직접 불을 붙였다.

이런 움직임을 반갑게 예의 주시하는 이들이 있다. 일본 정부에 의견을 개진하고 있는 청년·학생 대변 시민단체 와카모노(청년) 협의회의 무로하시 유키(32) 대표도 그중 하나다. 그는 “그간 블랙 교칙에도 순응하며 졸업한 학생들은 목소리 낼 줄 모르는 성인이 됐고, 일본 사회 정체의 주원인이 됐다. 젊은이들 투표율이 낮은 것도 학교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일본에서 유독 집회나 이의 제기를 볼 수 없는 것도 ‘어차피 해도 안 될 거야’라는 생각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교육학자이자 철학자인 도마노 잇토쿠는 저서에서 “젊은이들이 정치에 관심 없다는데, 그 책임은 학교에 있다. 변화가 가능하다고 배운 적이 없는데 나서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학교가 달라진다면 일본의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블랙 교칙에 든 반기가 그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예상이고 바람이다. 교칙에 들고일어난 학생들을 주목하는 눈이 적지 않은 이유다. 과연 일본 학생들이 블랙 교칙을 향해 던진 돌은 어디까지 굴러갈 수 있을까. 2020년의 날갯짓이 10~20년 뒤 일본 사회를 흔들어놓는 태풍으로 성장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소멸해 한때의 치기 어린 반항으로 기록될 것인가. 결과가 궁금해진다.

[이태동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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