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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9 (화)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602] 꽃가루 도마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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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학자의 삶을 시작하고 제일 처음 쓴 논문은 달랑 한 쪽 반이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석사과정을 밟던 시절 여름 학기에 돈을 벌기 위해 매일 트럭을 몰며 포충기(捕蟲器)에 잡힌 곤충들을 수거하는 실험 조수 일을 했다. 그때 내가 종종 점심 도시락을 까 먹던 언덕에는 마침 황금싸리가 만발했는데 그 꽃에서 꿀을 빨던 꿀벌과 호박벌의 행동을 관찰해서 쓴 논문이었다. 꿀벌은 황금싸리 꽃을 열어젖히느라 고생하는 반면, 그보다 조금 무거운 호박벌이 암술과 수술을 감싸며 떠받치는 용골꽃잎에 내려앉으면 꽃문이 활짝 열렸다. 꽃과 꽃가루를 나르는 매개자 사이도 이처럼 궁합이 맞아야 한다.

벌과 개미는 더할 수 없이 가까운 사촌 간이지만 개미에게 꽃가루 운반을 부탁하는 식물은 없다. 벌과 달리 진화 과정에서 날개를 잃어버린 개미는 꽃가루 매개자로서 매력을 상실했다. 제법 많은 식물이 벌이 없으면 차라리 새나 딱정벌레에게 부탁한다. 한결같이 날개가 달린 동물이다. 밤에 피는 꽃은 대개 박쥐와 계약을 맺었다. 박쥐에게는 벌에게 주는 꿀보다 훨씬 많은 양을 제공해야 한다. 꽃의 색이 화려할 필요는 없어 대개 흰색이다. 대신 향이 진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별명이 아예 ‘숨겨진 꽃(hidden flower)’이라는 식물이 있다. 거의 기다시피 땅에 붙어 사는 이 식물의 꽃은 이파리 아래 숨은 채 땅바닥에 거의 코를 박고 있다. 게다가 부드러운 연두색을 띠고 있는지라 도대체 누가 찾을까 싶었는데 주인공은 뜻밖에도 도마뱀이었다. 미끌미끌한 비늘로 뒤덮인 도마뱀이 어떻게 꽃가루를 옮길 수 있을까 의아했는데 꿀로 범벅이 된 도마뱀 콧잔등에는 꽃가루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영화 ‘쥐라기 공원’에서 이언 맬컴(Ian Malcolm)이 던진 명대사가 생각난다. “생명은 방법을 찾는다(Life will find a way).”

[최재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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