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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이슈 미술의 세계

한국 페미니즘 미술, ‘탈부계 지형도’를 그리다[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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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국 화단에서는 요즘 여성 미술·페미니즘 미술이 어느 때보다 힘을 받으며 회자되고 있다. 단순히 유행인지, 진정한 페미니즘 ‘리셋’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런 현상에 맞닥뜨려 여성작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지, 페미니즘 미술이 지금 어디까지 왔으며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크고 작은 물음이 꼬리를 문다. 1990년대 초부터 전시기획자·평론가·미술사가로 한국 페미니즘 미술과 행보를 같이해온 필자는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 마음이 산란해진다.

그럼에도 불구,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질문들에 다가가려 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담론적·미술사적 접근보다 현재진행형으로 작업하는 작가들과 그들의 작업에 초점을 맞추는 작가 연구를 통해 현 단계 페미니즘 미술의 실체, 그 변화 추이를 살펴본다. 여성작가들의 다양한 창작활동, 페미니즘의 다중적 의미를 고려해 1980년대부터 활동한 시니어 작가, 1990~2000년대의 중진, 2010년 이후 등장하고 있는 신진 작가 등을 대상으로 개별 작가론을 넘어서 관계의 그물망을 직조하고자 한다. 이는 약 반세기 동안 축적된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시간의 지도이자, 그 주역들이 함께 엮어내는 탈부계적 지형도다.

경향신문

여성미술을 주제로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 ‘언니가 돌아왔다’(2008) 전시 전경 일부. ‘김홍희의 페미니즘 미술 읽기’는 매회 지면에 초대할 ‘환상의 복식조’ 작가들의 한판 대결을 통해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지형도를 그려나간다. 경기도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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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미술의 지형도를 그리기 위해 우선 화업으로 인정받는 징표적 페미니스트와 최근 주목받는 신진 작가들을 염두에 두고 ‘나만의’ 명단을 작성했다. 그중에는 ‘페밍아웃’한 작가도 있지만 페미니스트로의 귀속을 거부하는 작가도 있다. 또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성적 불평등·성폭력의 트라우마로 페미니즘에 경도된 일시적 페미니스트일 수도 있다. 존재론 차원이나 인식론적 차원에서 해당 작가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든 아니든 필자가 중시하는 것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큐레토리얼, 비평적 판단이다. 그의 작업이 직간접적으로 페미니즘의 주요 화두나 의제를 다루고 있는가, 그것을 작품에 제대로 녹여내고 있는가가 관건이다.

단순히 여성적 감수성의 표출로 여성성·모성을 포장하거나 여성신화·역사적 사건을 소재화하는 유사·의사 본질론자들보다는 페미니즘 의식으로 여성성을 쟁점화하는 의식 있는 작가들을 일차적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 중에는 젠더보다 사회적 문제의식을 갖고 작업하는, 페미니즘과의 경계에 선 문명비판적 작가도 있다. 이들의 작업이 페미니즘을 심화·확장시킨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양자의 경계가 불분명하거나 작품개념이 애매모호한 경우 여성화단을 비옥하게 만드는 역량·업적에도 불구, 필자의 자의적 판단·주관적 기준에 따라 논의의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다.



페미니즘의 화두를 다루고
작품에 제대로 녹인 작가들
그들을 짝지어 그릴 지형도



초대 작가군의 범위가 좁혀졌다면 그들로 어떻게 한국 페미니즘 미술 지형도를 그릴 것인가. ‘짝짓기’ 또는 ‘그룹으로 묶기’다. 우선 여성성, 몸, 광기, 퀴어, 이산, 방랑, 가사, 노동, 초상, 여성적 추상, 컬렉티브 활동 등 화두를 설정하고 그에 걸맞은 작가들을 한 팀으로 편성한다. 선배와 후배를 팀으로 묶지만 꼭 일대일의 쌍을 이루지는 않는다. 팀 구성이 임의적·가변적일 수 있어 짝짓기로 필요충분 조건을 만드는 일이 지형도를 그리는 과제의 가장 어려운 부분으로 여겨진다.

팀별 작가들은 동일한 화두를 바라보는 상이한 시각, 구사하는 매체나 양식의 차이를 놓고 한판의 지상 대결을 펼친다. 그러나 이들의 대결은 종래 역전의 팀워크로 전환된다.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불화가 아니라 풍요롭고 조화로운 시너지로 일궈내며 공동목표를 위해 협업하는 ‘컬래버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호흡을 같이하고 운명을 함께하는 ‘환상의 복식조’다. ‘환상의 복식조’는 미술계라는 링 위에서 공공의 적에 맞서 힘겨운 투쟁을 벌이는 공동운명체다. 이 복식조의 적수는 비가시적이지만 강력한 부계적 가치관과 뿌리 깊은 문명적 대서사, 구체적으론 여성작가·여성미술을 폄훼하고 소외시킨 남성중심 화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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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미술을 주제로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 ‘언니가 돌아왔다’(2008) 전시 전경 일부. ‘김홍희의 페미니즘 미술 읽기’는 매회 지면에 초대할 ‘환상의 복식조’ 작가들의 한판 대결을 통해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지형도를 그려나간다. 경기도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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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사회적·문화적·성적 평등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 작가들은 비명시적·은유적 시각언어와 여성적 상상력으로 억압돼 온 것, 비가시적인 것, 부재하는 것을 소환하는 윤리적 페미니즘의 책무를 스스로에게 부과한다. 나아가 신분·인종·성별·장애 등 차별유형들의 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주목하고 양성평등과 젠더중립(gender-neutral)을 추구하는 최근 4차 물결의 페미니즘에 공감하면서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상, 밝은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것이 컬래버 모델로서 ‘환상의 복식조’에 내재된 반전의 의미다.



공공의 적에 맞서 싸우는
공동운명체인 그들을 통해
양성평등·젠더중립 위한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김홍희의 페미니즘 미술 읽기-환상의 복식조’ 시리즈에서 필자는 미술사·여성운동사·현대미술 이론·페미니즘 담론을 참조로 작가론이자 비평문이며 전시기획문도 될 수 있는 경계가 애매한 글쓰기를 시도한다. 비일원론적이고 젠더 특정 글쓰기를 통해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성과를 가늠해보는 것이다. 이는 축적된 여성미술사의 토양 위에서 가능하다. 각 복식조가 구성된 근거와 이유 등 그 배경 이해를 위해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흐름을 잠시 개괄한다.

한국 페미니즘 미술은 1980년대 후반 김인순·윤석남·김진숙·정정엽 등 민중계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물꼬를 텄다. 이들은 근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억압당한 여성의 삶, 창작활동과 노동현장에서 불평등한 여성의 현실을 주목해 리얼리즘 재현 양식으로 그 실상을 고발, 민족예술과 삶의 예술 강령을 실천하고자 했다. 미술 내적으로는 모더니즘 미술이 제도화된 부계적 미술, 생활과 유리된 자율적 미술, 서구로부터 수입된 외래미술이라는 점에서 반모더니즘 입지를 공고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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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미술 기획전 ‘여성, 그 다름과 힘’ 포스터(한국미술관·1994)와 ‘99여성미술제-팥쥐들의 행진’전(예술의전당) 도록의 작품들, 기획전 ‘언니가 돌아왔다’의 포스터. 김홍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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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페미니즘 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정신을 반영, 한편으론 본질주의 정치학을 수용함으로써 사회주의 이념을 희석시키고 1980년대 민중페미니즘을 재점화한 포스트민중 페미니스트, 다른 한편으론 해체주의 발상으로 탈이데올로기를 표방하고 대중소비사회·뉴미디어에 주목한 새로운 감수성의 신세대 작가들에 의해 주도됐다. 전자가 윤석남과 박영숙, 1997년 결성된 ‘입김’의 집단활동에 의거했다면 후자는 신세대 소그룹운동의 주역이자 신매체 실험과 괄목할 만한 도발적 작업으로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전형을 마련한 작가 이불로 대변됐다. 별도로 김수자는 여성 가사행위를 미학화하는 천 작업과 노마디즘을 함의하는 보따리 작업으로 동시대 페미니즘 미술의 한 축을 담당했다.

2000년대는 1990년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지만 대안공간·레지던시를 배경으로 등장한 후기 신세대가 바통을 이어받는다. 이들에게 창작동력을 부여한 화두는 글로벌리즘과 노마디즘을 둘러싼 정체성 문제다. 이들과 정서를 공유하는 가운데 송상희·정은영은 정체성의 문제를 젠더와 재현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동시에 1990년대 중후반 등장한 운동권 중심의 ‘영페미니즘’ 물결 속에서 부계구조로부터의 전략적 분리를 요구하며 담론적·실천적 투쟁을 벌이는 본격 ‘페밍아웃’ 페미니즘을 실천했다.

201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이전 세대와 차별화된 새로운 가치·태도의 페미니즘, SNS를 통해 ‘리부트’된 페미니즘의 새로운 주체 이른바 ‘넷페미’가 등장한다. 이는 암울한 청년세대의 절망과 갈망을 대변하는 저항적 페미니즘이자 세계적 미투 운동의 파급, 2018년 이후 문화예술계를 강타한 성폭력 사태의 충격을 배경으로 태동한 전복적 해시태그 운동이다. 사회를 뒤흔든 페미니즘 열풍 속에서 페미니즘 미술 역시 집단적 발언과 함께 급진적 본질주의, 퀴어의 재현을 성행시키고 있다. 비영리예술공간 ‘합정지구’, 시각예술웹진 ‘아그라파 소사이어티’, 시각예술 컬렉티브인 ‘노뉴워크’는 강력한 지적 동력과 추진력으로 정치적 행동주의(액티비즘)와 미학적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창작·기획의 플랫폼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여성예술인연대’(AWA), ‘여성문화예술연합’ 등 운동적 연대체들은 메갈리아·워마드로 대변되는 온라인 페미니스트 커뮤니티의 급진적 현상에 대한 미술적 피드백을 실험적으로 가시화하는 행동주의를 수행하고 있다.

한국 페미니즘 미술을 세계적 페미니즘 운동사 흐름에 비춰보면 지역적이면서도 초지역인 시대적 현상임을 이해하게 된다. 19세기 자유평등사상에 기초한 인본주의 페미니즘이 1차 물결이라면, 1968년 학생혁명에 의해 고무돼 사회·문화적 평등을 외치며 현대 페미니즘의 문을 연 1970년대 ‘평등의 페미니즘’을 2차 물결로 파악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한국 민중페미니즘 미술운동은 2차 물결과 맥락을 같이한다. 1980~1990년대 3차 물결의 페미니즘은 평등보다는 남녀의 본질론적 차이, 여성들 간의 지역적·계급적·문화적·신체적 차이를 강조하는 ‘차이의 페미니즘’과 부계질서의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해체주의 페미니즘’의 양대 흐름으로 전환된다. 1990~2000년대의 한국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미술은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듯 본질주의와 해체주의를 포함하는 복합적 양상으로 전개된다. 2010년 중후반 이후 한국 넷페미 운동은 세계적 미투 현상의 산물인 만큼 인터넷을 사용하고 교차성에 주목하는 4차 물결의 페미니즘과 동시대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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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 문제가 이슈화된 ‘강남역 살인사건’(2016년 5월)의 2주기 추모 집회 장면.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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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부분은 한국의 페미니즘이 세계적 흐름과 행보를 같이하면서도 자생적 측면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적 풍토에서 태동한 민중페미니즘을 시발로 영페미니즘, 넷페미로 이어지는 한국의 페미니즘은 낙태죄 폐지, 디지털 성매매 처벌강화 같은 실천적 성과를 거두며 유의미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더구나 한국 페미니즘은 가부장제 해체 등 여전히 유효한 전시대 페미니즘의 기본과제를 계승, 단절보다는 연쇄적 변화 속에서 발전하는 페미니즘 미술의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신·구세대의 의미 있는 교류와 상호 환대, 여성적 연대의 역량 강화는 한국 여성화단이 추구해야 할 절실한 명제다. 이것이 ‘환상의 복식조’의 숨은 뜻이자 이들이 일궈낼 페미니즘 지형도의 바람직한 모습이다.

이제 ‘환상의 복식조’ 첫 라운드를 시작한다. 페미니즘 지고의 주제인 여성성과 본질론을 화두로 설정하고 이에 부합하는 작가로 한국의 징표적 페미니스트 미술가인 윤석남과 떠오르는 신진 페미니스트 장파를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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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큐레이터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과 경기도미술관, 대안공간 쌈지스페이스 관장 등을 거쳐 현재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이다. 카셀도큐멘타14 감독선정위원·광주비엔날레 총감독·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등을 지냈다. 다수의 페미니즘 미술전과 백남준·미디어아트 전시를 기획했다. 저서로 <여성과 미술> <굿모닝 미스터 백> <큐레이터는 작가를 먹고산다> 등이 있다. 김세중상(저작출판), 석주미술상(평론), 월간미술대상(큐레이터) 등을 수상했다.



김홍희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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