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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뉴욕, 시카고, LA…비극 끌어안은 검은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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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 맞선 존 헨리 사진전 ‘스트레인저 프루트’

한겨레

미국 흑인 사진가 존 헨리가 2018년 선보여 주목받은 대표작 <무제 19>. 시카고 도심 매그니피선트 마일의 분수대를 배경으로 죽은 아들을 안고 비통에 빠진 흑인 어머니의 ‘피에타’ 포즈를 연출했다. 지난 7년간 흑인 모자를 소재로 촬영해온 그의 ‘피에타’ 근작들은 고전적 도상의 미학적 구도를 바탕으로 인종차별의 위험성을 색다르게 드러낸 작업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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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말 거장 미켈란젤로의 명작이 탄생한 뒤 ‘피에타’상은 모성의 슬픔과 고통에 대한 예술적 표현의 대명사가 됐다. 숨이 끊어진 아들 예수의 몸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비탄에 빠져 내려다보는 성모의 모습은 후대 화가와 조각가들에 의해 무수히 변주됐다.

팬데믹 시대엔 양상이 다르다. 여기, 전혀 다른 피에타가 등장한다. 인종차별과 폭력에 대한 사회적 저항을 함축한 흑인 모자의 피에타상을 포착한 사진이 내걸리고, 음울한 탁성의 빌리 홀리데이가 부르는 재즈곡 ‘이상한 열매’(스트레인지 프루트)가 흐른다. 남산 기슭 후암삼거리 골목에 자리한 케이피(KP)갤러리에서 지난 13일 시작한 기획전시 ‘스트레인저 프루트’의 풍경이다. 전시는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부제를 달고 미국 흑인 사진가 존 헨리의 피에타 연작 20여점을 선보인다.

미국 코닥사의 포트라 400 필름으로 찍고 연출한 흑인 모자 피에타상은 우리가 아는 피에타상과는 많이 다르다.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같은 미국 현대 도시의 도심이나 공원, 혹은 바닷가 등에서 다양한 나이대와 얼굴상의 흑인 엄마가 덩치가 훨씬 큰 아들을 안고 침울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자세를 연출한다.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고전 조각상에서 흔히 보이는 숭고한 ‘비애의 미학’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오직 슬픔과 비극이 지속될 것 같은 불안감과 체념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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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헨리의 흑인 ‘피에타’ 연작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2014년 작 <무제 10>. 뉴욕의 한 성당 안에서 흑인 여성이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아들의 주검을 무릎에 눕혀놓고 정면을 응시하는 ‘피에타’ 구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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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엔 뚜렷한 사회적 배경이 깔려 있다. 원래 스포츠 인물 사진을 찍던 작가가 지난 10여년간 백인 경찰관의 폭력으로 젊은 흑인이 희생된 사건을 무수히 접하면서 그 사건의 시공간과 피해자 어머니의 심경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제 사건의 피해자가 아니라 자원한 일반인 모델이지만, 언제든 자신에게도 이런 비극이 닥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면서 촬영에 응했다. 전통적인 기독교 도상학에서 큰 영향을 받은 작가는 상존하는 백인들의 차별과 린치로 피해를 보는 흑인의 의식을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표현했다. 저널 다큐 사진 특유의 현장성을 바탕으로 차별에 항거하는 연출 퍼포먼스를 고전 예술의 피에타 도상으로 각색한 결과물인 셈이다.

존 헨리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활동하며 흑인 어머니와 희생자 아들의 연출 사진을 계속 작업해왔다. 지난해 5월 터진 백인 경관의 조지 플로이드 살해 사건으로 헨리의 연작은 더욱 주목을 받았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더이상 포플러 나무에 흑인의 몸이 매달리진 않지만, 여전히 흑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존재하며 흑인 가정의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장소와 방식을 확대해 작업할 의지를 내비쳤다. 재즈가수 빌리 홀리데이가 인종주의와 흑인에 대한 폭력을 고발하기 위해 1939년 발표한 리메이크곡 ‘이상한 열매’를 차용한 헨리의 사진은 뉴욕의 애퍼처 사진재단 등 주요 갤러리에서 소개됐고, 아널드 뉴먼 상과 필름포토 프라이즈 등을 받았다. 전시장 안쪽에선 존 헨리의 인터뷰와 빌리 홀리데이가 ‘이상한 열매’를 부르는 영상도 볼 수 있다. 2월9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도판 케이피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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