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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탈레반, 아프간 장악

아프간 "탈레반에 정권 이양"...사실상 항복, 미국 '제2의 베트남 패전' 현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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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간 가운데 15일(현지시간) 철수작전에서 나선 미군의 치누크 헬기가 카불 주재 미 대사관 상공을 날고 있다. 카불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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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 친미(親美) 성향의 현 정부가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 탈레반에 사실상 항복했다. 이달 말 미군의 완전 철군을 보름가량 남겨 두고서다. 국토 대부분을 장악한 탈레반이 수도 카불 관문까지 진입, 정부 측에 투항을 요구하자 결국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약속하며 백기를 들었다. 이에 따라 지난 20년간 세계 패권국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시작한 아프간 재건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미국은 ‘제2의 베트남 패전’이란 치욕을 맛보게 됐다. 탈레반과 미국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측의 협상도 조만간 본격화할 전망이다

15일(현지시간) AP통신 등에 따르면, 압둘 사타르 미작왈 아프간 내무장관은 이날 대통령궁에서 탈레반과 사실상의 정권 이양 논의를 시작했다. 협상의 목표는 평화롭게 권력을 넘기는 데 있다. 미작왈 장관은 “아프간 사람들은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며 “도시에 대한 공격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결정은 탈레반이 수도 카불에 진입한 지 한 시간 만에 이뤄졌다. 당시 반군은 “전사들에게 더 이상 수도로 밀고 들어가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며 무력으로 점령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탈레반의 정권 탈환은 예고된 수순이다. 반군은 이미 이날까지 아프간 34개 주도(州都) 가운데 25곳에 깃발을 꽂았다. 전날에는 북부 최대 도시이자 반(反)탈레반 거점 도시인 마자르-이-샤리프와 수도 카불의 ‘동쪽 방어벽’인 잘랄라바드마저 순식간에 함락시켰다. 아프간 정부가 카불 수성을 위해 주변 지역에 군사력을 집중시켰지만 이렇다 할 교전 없이 무력하게 밀렸다. 일부 도시의 경우 정부군이 저항을 포기하면서 반군이 무혈입성하기도 했다. “자고 일어나니 흰 깃발이 도시에 나부꼈다”는 현지 주민들의 말이 나올 정도다.

탈레반의 카불 입성은 미군이 2001년 11월 13일 이곳을 점령한 이후 약 20년 만이다. 함락과 정권 이양 시기 역시 예상보다 빠르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카불 함락 시점을 미군 철수 6~12개월 후쯤으로 예상했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 역시 지난 11일 정보당국이 미군 철수 한 달 만에 수도가 반군 손에 넘어갈 것으로 예상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들은 공세를 시작한 지 3개월 만, 지난 6일 님로즈주(州) 주도 자란지를 점령한 이후 아흐레 만에 카불 진입에 성공했다.

반군의 압제적 통치가 현실화하면서 현지에선 이를 피해 국외로 떠나려는 ‘아프간 엑소더스(대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달 말로 철군 시한을 제시한 미국은 이날 카불 주재 대사관 외교관들의 철수를 시작했다. 대사관 직원들은 민감한 문서나 자료 등을 파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역시 아프간 주재 자국 외교관을 오는 16일까지 현지에서 탈출시키고, 3,000여명의 자국민을 대피시키기로 했다. 현지 자산가들 역시 도피에 나섰다.

실제 이날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는 해외로 탈출하려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AP통신은 “공항 터미널 밖 주차장에 마련된 항공권 판매 창구에는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늘어섰고 현지 항공사 항공편은 다음 주까지 예약이 꽉 찼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앞다퉈 달러 사재기와 현금 인출에 나서면서 아프가니ㆍ달러 환율은 지난주 달러당 80아프가니에서 100아프가니로 25%나 급등했다.

외국으로 떠날 형편조차 안 되는 시민들의 상황은 더욱 처참하다. 최근 탈레반 점령지에서 강제 징집과 강제 결혼 등 ‘인권 시계’가 20년 전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이어지자 주민들은 무장조직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카불로 몸을 피해 왔다. 비정부기구(NGO) 세이브더칠드런에 따르면 최근 며칠 새 2만 가구가 수도로 향했다. 아프간 평균 가구원 수가 8명인 점을 고려하면, 피란민은 12만 명에 달한다. 이들은 대부분 황급히 몸만 빠져 나온 탓에 공원이나 거리에 머물고 있다. 반군의 카불 장악이 현실화할 경우, 이들 앞에 놓인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고국을 등지거나, 탈레반의 공포 정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재 아프간과 국경을 접한 파키스탄에 등록된 아프간 난민 수는 140만 명, 미등록 난민까지 합치면 300만 명에 달하는데, 앞으로 이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공산이 크다. 로리 스튜어트 전 영국 국제개발부 장관은 BBC방송에 “이제 아프간 상황은 ‘인도주의적 재앙’이 됐다”며 “고국을 떠나는 난민들을 위해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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