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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이슈 탈레반, 아프간 장악

수포로 돌아간 미국의 20년 아프간 전쟁...'사이공 철수' 반복하며 리더십만 타격 [다시, 탈레반의 아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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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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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이후 베트남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1975년 4월29일(현지시간) 베트남 호치민(옛 사이공) 미국 국제 개발청 직원 숙소 옥상에서 구출 헬기를 타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당시 미국 정부의 ‘프리쿼트 윈드’(빈번한 바람) 구출 작전으로 미국 시민과 동맹국 시민 7000여명이 호치민 여러 장소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경향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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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 전 사이공(현재 베트남 호찌민)에서 벌어졌던 일이 반복됐다. 20년 동안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2조달러(약 2340조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간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결국 미국의 패배로 끝났다. 미국이 돈과 병력을 쏟아부으면 적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자만심에 빠졌을 때, 탈레반은 숨어서 잡초처럼 힘을 키웠다. 9·11테러 이후 충동적으로 전쟁을 벌인 미국은 아프간을 재건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헬기를 동원해 자국 대사관 직원들을 탈출시키는 굴욕을 겪으며 리더십에 타격을 입게 됐다.

탈레반은 15일(현지시간) 수도 카불에 입성해 아프간 대통령궁을 장악했다. 대통령궁에는 탈레반기가 게양됐고, 탈레반 대변인은 “아프간에서 전쟁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탈레반의 카불 점열 다음날인 16일 날이 밝기도 전에 수천명의 시민이 아프간을 탈출하기 위해 공항으로 몰려들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한꺼번에 활주로로 몰려들자 이들을 해산하려고 미군이 발포하면서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1975년 월남 패망 직전의 ‘사이공 탈출’을 떠올리게 하는 급박한 상황이 이어졌다. 카불 주재 미국 대사관은 성조기를 내리고 전원 철수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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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시작은 2001년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알링턴 펜타곤에서 일어난 9·11테러였다.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조직인 알 카에다가 4대의 비행기를 납치해 건물에 항공기를 충돌시킨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3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행정부는 복수를 다짐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테러가 일어나고 3일 후 의회에서 400억달러에 이르는 긴급 지원 군비와 무력사용권을 승인받았고, 10월 영국군과 함께 탈레반이 집권하던 아프간 공습을 개시했다. 파병 인원도 2008년에는 6만6000여명으로 늘어났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독일 등 동맹 조직 혹은 국가에도 아프간 전쟁 참전을 부추겼다.

이 때만 해도 빈 라덴 제거라는 전쟁의 목적이 명확했다. 당시 미국 시민들도 미·영 합동군의 첫 아프간 공격에 대해 90% 이상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미군은 전쟁 시작 한 달 만인 2001년 11월 아프간 수도 카불을 차지했고, 그후 한달도 안 돼 탈레반의 성지인 남부 칸다하르까지 손에 넣었다.

하지만 미국이 2003년 발발한 이라크전에 집중하면서 아프간 전쟁은 실패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인 아프간 민심을 잡지 못했다. 수년간 미 국방부 고위 관리를 지낸 카터 말카시안은 저서 <아프간에서 미국의 전쟁>에서 “아프간 시민들은 정부가 비무슬림 외국인에게 의존하는 것으로 봤다”며 “미국인들이 아프간에 있다는 사실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종교적 헌신을 해온 아프간의 정체성을 짓밟았다”고 전했다.

결정적으로 2011년 빈 라덴을 사살한 이후 미국은 아프간전의 목적을 잃었다. 그해 버락 오바마 당시 정부는 미국 외교의 무게 중심을 중동에서 아시아로 옮기는 ‘피봇 투 아시아’ 전략을 발표하며 아프간전에서 발을 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2014년 아프간 정부군에 병권을 이양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탈레반의 공격 앞에 정부군과 민간인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자 이듬해 철군 계획을 취소했다.

평화적 정권 이양 기회를 놓친 것도 실책이다. 2016년 파키스탄에 은둔하던 탈레반 지도자 아크타르 만수르가 미국 공습으로 사망한 것이 대표적이다. 만수르는 사업가이자 탈레반 고위 지도자 중 평화회담에 관심을 가진 실용주의자였다. 네덜란드 저널리스트이자 탈레반 연구 권위자인 벳 댐은 “평화회담에 관심 있다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낸 만수르를 죽인 건 미국 정부의 큰 실수였다”고 지적했다.

이후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단지 “돈이 아깝다”며 철군을 서둘렀다. 아프간의 평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철군이 결정된 뒤에 카타르 협상 테이블에 탈레반과 마주앉게 된 아프간 정부는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는 미군 카드를 잃은 상태였고,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조 바이든 정부도 전 정권의 계획을 이어받아 9월11까지 완전 철군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아프간에 남는 것이 미국에 득이 될 게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철군 시나리오를 세우며 심각한 오판을 했다. 카불이 탈레반에 위협받는 일은 최소 1년~1년6개월 이후에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지만, 예상보다 너무 빨리 아프간 정부가 붕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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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막대한 수의 희생자들과 천문학적 비용의 빚을 남겼다. AP통신은 지난 4월까지 2448명에 달하는 미군이 숨졌고, 미국이 쏟아 부은 돈은 2조2610억달러(약 2524조4000억원)에 달한다.

아프간전의 결과가 11년 전쟁 끝에 패배하고 철수한 베트남전과 비슷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린든 존슨 정부는 1964년 조작된 통킹만 미 구축함 공격 사건을 빌미로 전쟁을 벌인 시작했지만 결국 5만8000명이 넘는 병력만 희생시켰다. 아프간 전쟁에 참전했던 퇴역 미군 제이슨 뎀시는 워싱턴포스트에 “우리는 총과 돈을 이용해 원하는 모습으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결과 아프간의 문화·정치·역사를 무시했고, 우리의 생각은 비극적으로 틀린 것이었다”고 말했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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