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러 5차 협상 진전 후 엇갈리는 전망
그러나 미국과 서방은 물론 우크라이나 내에서도 “러시아의 또 다른 술책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론이 쏟아지면서 양측이 합의에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만만치 않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가 “(평화 협정 진전에 따라) 키이우(키예프)와 북부 체르니히우에서 군사 활동을 축소하겠다”고 밝힌 것에 대해 “러시아의 행동을 보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예단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수차례 부인해 놓고 결국 전면전을 일으킨 러시아를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백악관은 “러시아의 군사 활동 축소는 (다음 공격을 위한) 병력 재배치를 의미한다”는 브리핑도 내놨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도 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정상과 화상회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러시아군이 (군사 활동 축소가 아닌) 재편성과 보급을 위해 본국과 벨라루스로 물러나고 있다”는 영국 국방부 보고에 따른 것이다. 존슨 총리는 “(우크라이나 공격을 계속하려는) 러시아가 완전히 생각을 바꾸도록 추가적 제재 조치와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 역시 “푸틴은 ‘승리’라고 선전할 수 있는 결과를 얻기 전까지 절대 전쟁을 끝내지 않을 것”이라며 “러시아는 아직 키이우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기대와 불신이 뒤섞인 반응을 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5차 협상 종료 직후 발표한 화상 연설에서 “협상에서 나오는 신호는 긍정적이나, 러시아의 공격이 멈추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또 “(군사 활동 축소 발표는)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으로 후퇴한 것에 불과하다”며 “경계 태세를 늦춰선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이날 덴마크 의회 화상 연설에서는 “러시아군이 강간과 약탈, 어린이 납치를 저지르고 마리우폴의 민간인 10만여 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며 “대(對)러 제재는 전쟁이 끝나고 정의가 바로 설 때까지 멈춰선 안 된다”고 역설했다.
이와 반대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전쟁에 지쳐 휴·정전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관측도 확산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남동부(흑해 연안)를 제외한 대부분 전선에서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에 시달리고 있다. 병력 손실은 사망자 기준 최대 1만6000여 명(나토 추산)에 이른다. 영국 가디언 등은 “보급 부대를 노린 우크라이나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러시아군 병참이 큰 타격을 입었다”며 “급격한 사기 저하로 병사들이 전투 명령에 불복하고 탈영하는 일도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전쟁을 지속할 경제적 여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휴·정전 기대를 높이고 있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 퇴출, 러시아인의 해외 자산 동결, 러시아산 에너지 금수 조치, 400개 이상 서방 기업의 철수 등 고강도 제재 효과로 러시아 경제는 2000년 이후 최악의 상황이다. 지난 1월 4.4%였던 러시아의 실업률 전망치는 8%대로 뛰었고, 국내총생산(GDP)은 올해 8~15% 역(逆)성장이 예상된다. 석유·천연가스 판매로 비축한 6300억달러의 외환보유액은 대부분 해외에 예치된 탓에 못 쓰는 처지가 됐다. 이 때문에 외화(달러화) 국채 원금과 이자를 갚지 못하는 채무불이행(디폴트) 가능성이 크다. NYT는 “러시아 경제의 고립 수준이 소련 붕괴 이전으로 돌아갔다”고 평가했다.
우크라이나 역시 민간인 사상자 급증으로 전쟁 지속의 부담이 크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지금까지 1만명이 넘는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보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가능한 한 많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 승리”라며 러시아와 타협 가능성을 높였다. 이런 와중에 마리우폴 함락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러시아와 친러 돈바스 지역, 크림반도를 잇는 육로 회랑이 완성돼 러시아의 체면을 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전과’가 확보됐다는 해석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중립화’와 ‘크림반도의 15년간 현상 유지’ 같은 평화 협상 논의 사항이 푸틴과 젤렌스키에게 협상의 명분을 줄 것이란 관측도 있다.
[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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