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7 (수)

이슈 중대재해법 시행 후

노동자 떨어지고 끼여 죽어도, ‘대기업’은 빠진 중대재해법 1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2020년 4월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산재사망대책마련공동캠페인단 주최로 ‘2020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이준헌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고 발생 위험성 높음’, ‘작업을 지속하려면 즉시 개선이 필요한 상태’

대한산업안전협회가 경남 양산의 한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에 보낸 안전점검 보고서 내용이다. 하지만 보고서가 무색하게 이 업체 공장에서는 지난해 7월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기계 찌꺼기 제거 작업을 하던 중 기계에 끼여 사망했다. 검찰은 안전보건관리체계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업체 대표이사를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오는 1월27일이면 중대재해법이 시행된 지 1년이 된다. 중대재해법은 노동자가 일하다 사망했을 때 사업주는 물론 원청의 경영책임자까지 처벌하는 법이다. 19일 경향신문은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지난 1년간 검찰이 기소한 중대재해법 사건 공소장 전체(11건)를 확보했다. 전수 분석 결과 검찰 기소는 중소기업에 집중됐고, 최초 공사를 하도급한 주체는 기소대상에서 빠졌다.

검찰 공소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기소 대상은 공사 규모는 크지만 상시근로자 수가 적게는 18명, 20명인 업체가 있었다. 많게는 340명인 업체도 기소된 사례가 있다. 하지만 지난해 1월29일 토사 붕괴·매몰 사고로 노동자 3명이 사망해 중대재해법 적용 1호가 된 삼표산업 사건을 비롯해 현대건설, 현대제철, 동국제강 등 대기업에서 발생한 사망사고 사건은 아직 처분이 이뤄지지 않았다.

업종별로 보면 11건 중 건설업이 8건, 제조업이 3건이었다. 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4건, 기계에 협착 3건, 장비 등이 무너져 깔린 경우 3건, 화학물질 피해 1건이었다. 모두 안전방호망·안전통로 설치, 안전대 연결, 작업계획서 작성 등 기본적인 안전조치가 없어 발생한 사고였다.

경향신문

경기도 성남 판교제2태크노벨리 신축공사 현장에서 노동자 2명이 추락해 사망한 사고가 일어난 다음날인 지난해 2월9일 중대재해기업 사업주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전국건설노동조합원들이 청와대 앞에 놓은 안전화에 향을 피우며 사망한 노동자를 추모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다단계 하도급 속 최상위 업체는 기소 면해


검찰은 공소장에서 대표이사가 안전 예방을 위한 ‘시스템’을 사전에 마련하지 않은 점에 주목했다. 안전을 경영방침으로 정하지 않거나 사업 특성에 따른 위험·유해요인을 확인해 개선하지 않은 사례, 사고 예방을 위한 장비 구입 예산을 편성하지 않은 사례가 그에 해당한다. 안전보건총괄책임자(현장소장)의 안전업무를 평가하는 기준, 급박한 위험에 대비한 작업중지 매뉴얼이 마련돼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특히 중대재해법은 원청의 경영책임자에게 적용되는 만큼 검찰은 하도급 업체를 선정할 때 안전 능력을 확인하는 절차가 미비한 게 대표이사 책임이라고 봤다. 고양지청은 “근로자들의 참여를 통해 실질적인 위험 요인을 찾아내 평가할 수 없도록 했다”는 점을 의무 미이행으로 기재했다.

공소장에선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눈에 띈다. 11건 중 피해자가 원청 소속인 사례는 2건뿐이다. 하청업체 소속은 2건, 재하청업체 소속은 6건이었다. 4단계 도급단계를 거친 하청업체 소속도 1건 있었다. 검찰은 최초 공사를 하도급한 주체를 모두 기소하지는 않았다. 대체로 피해자가 소속된 업체의 바로 윗 업체를 기소했다. 실질적인 원청은 형사책임을 피한 것이다. 중대재해법은 ‘발주처’를 처벌대상으로 명시하지 않았지만, 노동계는 중대재해법의 입법 취지상 발주처도 처벌대상에 포함된다고 본다.

인천지검은 피해 노동자가 4번의 도급 단계를 거친 하청업체 소속인 사건에서 첫번째 도급을 받은 업체에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이행 의무가 있다고 보고 기소했다. 제주지검은 피해 노동자가 재하청업체의 실질적 운영자이면서 상위 업체로부터 공사를 하도급받은 수급인인 사건에서 해당 노동자를 ‘노무를 제공하는 종사자’로 보고 상위 업체를 기소했다. 영세업체는 대표도 일반 노동자처럼 일하는 경우가 많다.

검찰이 지난 1년간 기소한 건수는 지난해 611건의 사망사고가 발생해 644명의 노동자가 숨진 사실(고용노동부 공식 통계)에 비춰보면 상당히 적은 수치다. 중대재해법 적용 대상인 50인 이상 사업장·공사금액 50억원 이상 사업장으로만 따져도 사망자가 256명인데 노동청이 검찰에 송치한 사건은 37건에 불과했다.

윤석열 정부가 기업 규제를 완화하고 중대재해법을 완화하려는 움직이을 보인 것이 수사기관의 소극적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영계가 법의 모호성을 제기하고 대기업들이 대형로펌을 동원해 적극 항변하는 탓도 있다.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는 “대통령이 법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정부가 법 개정에 나서는 상황에서 검찰이 사건을 뭉갠다고 본다”며 “검찰의 기소 비율이 상당히 낮은 이유가 과연 중대재해에 법 위반이 없었기 때문인지 의문”이라고 했다.

경향신문

2021년 5월16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 ‘일하다 죽지 않게’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이준헌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법원에선 “산업노동자는 부속품 아냐” 목소리도


법원에서 나온 중대재해법 판결은 아직 없다. 법원은 첫 기소 사례인 두성산업 사건에서 중대재해법이 위헌인지 여부를 조만간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중대재해법 취지를 양형에 반영한 판결은 있었다. 서울북부지법 이종광 판사는 지난해 11월 노동자 사망 책임으로 사업주가 기소된 사건에서 “우리나라 산업계의 구조적인 후진국형 현실은 강력한 처벌이나 더 큰 경제적 부담이 부과될 때야 담보되어질 수 있다. 비록 피고인들이 피해자의 유족과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산업안전보건법의 개정 취지나 중대재해처벌법의 입법 취지에 따라 형을 정한다”며 실형을 선고했다.

이 판사는 양형이유에서 “산재 사망자들에게는 교통사고 사망자 정도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사건이 종결되고, 가해자들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며 “산업 노동자들은 한번 쓰고 버리는 공작기계의 부속품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탄희 의원은 “현장에서 노동자 안전이 위협받는 원인은 단 하나, 기업의 비용 절감”이라며 “노동자가 죽고 다치면 더 큰 비용을 치룬다는 판례들이 쌓여야 기업의 인식이 바뀌고 노동 환경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이 제대로 시행되기도 전에 기업이 산재 사망사고의 책임을 피할 수 있는 길만 터주기 위한 중대재해법 개정은 말 그대로 개악”이라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 나는 뉴스를 얼마나 똑똑하게 볼까? NBTI 테스트
▶ 이태원 참사 책임자들 10시간 동안의 타임라인 공개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