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11 (목)

    [겨를]가장 가까운 곳으로의 여행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어릴 때 쓰던 책상 위에는 지구본이 있었다. 그 작은 구체는 내게 세계를 한 손에 쥘 수 있는 사물로 만들어줬다. 지구는 작고 둥그니까 인간은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믿게 했다. 그 덕분이었을까. 성인이 된 나는 여행자가 됐다. 유럽의 국경을 마음껏 넘었고, 낯선 세계로 떠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게 세계는 지구본만큼 작았고, 딱 내 보폭만큼 넓어 보였다. 내가 밟은 모든 땅은 여행자에게 호의적이었고, 나는 불편하거나 위험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낯섦’을 즐겼다. 더 넓은 선택지, 더 먼 거리, 더 많은 나라.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곧 세계를 얼마나 많이 점유하느냐로 측정되는 듯했다. 각 나라의 관광지에서 사진을 찍고, 맛집을 찾아가고, 기념품을 사면서 내가 만나고 싶었던 ‘낯섦’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넓이를 좇던 내 여행에 물음표를 던진 것은 우연히 TV에서 본 난민들이었다. 전쟁을 피해 바다 건너 유럽의 땅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의 배를 누군가 밀어내는 장면. 여자와 아이, 노인을 태운 배가 다시 망망대해로 내몰리는 것을 보며, 처음으로 내가 가진 여행자의 자유가 부끄러웠다. 그날 이후, 내 여행은 늘 비슷한 기대로 시작해 돌아오는 순간마다 묘한 공허감을 남겼다. ‘모든 곳이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바라본 세계는 환상의 베일을 한 겹 벗고 있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을 허무와 슬픔 외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것을 ‘트리스테포스트이테룸(여행이 끝난 후의 슬픔)’이라고 불렀다. 낯선 세계를 경험한 뒤 집으로 돌아올 때 밀려오는 허무, 내가 바란 게 정말 이것이었는가 묻게 되는 마음을 뜻한다. 그 슬픔의 원인을 생각해 보면, 여행의 즐거움이나 풍경의 아름다움과는 무관했다. 그것은 내가 본 것이 진짜 삶이 아니라 쇼윈도에 불과했다는 깨달음, 낯선 세계와 제대로 관계 맺지 못했다는 자책에서 비롯된 감정이었을 것이다. 깊이 없는 만남에서 오는 허전함은 인간관계만이 아니라, 인간과 장소의 관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한 장소를 소비해버린 후회, 나 자신이 쉬운 소비자가 됐다는 실망감이 여행 기념품 위에 쌓인 먼지처럼 기억을 뿌옇게 덮는다. 나와 그 장소들은 어떻게 만나야 했을까.

    이제 나는 멀리 떠나는 여행에 대한 환상을 품지 않는다. 더 넓은 세상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그곳의 한 조각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도 없다. 그래도 오래전에 여행을 꿈꾸며 품었던 낯선 세계를 향한 기대만큼은 간직하고 싶다. 내가 모르는 세계에서 나와 다른 존재들이 살아가고 있고, 그들의 삶이 이곳의 내 삶만큼 귀하다는 믿음은 소비적 여행보다 훨씬 더 내 상상의 지평을 넓힌다.

    지금 내 책상 위에는 지구본 대신 동네를 산책하며 기록하는 작은 수첩이 놓여 있다. 어제의 기록을 펼치면 이렇게 적혀 있다. “하루도 같은 아침이 없다. 빛은 매일 새롭다.” 이곳에서 나는 날마다 가장 가까운 곳을 걷는 여행자이고, 나의 여행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로운 풍경을 펼쳐 보인다. 이 여행에서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단 한 가지다. 하루치의 작은 경이로움.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충분하다는 것, 얼마나 경이로운 말인가.

    경향신문

    신유진 작가


    신유진 작가

    ▶ 매일 라이브 경향티비, 재밌고 효과빠른 시사 소화제!
    ▶ 더보기|이 뉴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 점선면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