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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공공요금 인상 파장

[황정미칼럼] 천수답 에너지 정책이 키운 난방비 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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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방비 급등에 정치권 네 탓 타령만

에너지 위기 고조 때 정부 뭐 했나

정권 유불리 따른 단기 대응책으론

에너지 안보 리스크·국민 부담 키워

아파트 관리비 명세서를 받을 때마다 늘 의문이었다. 전기요금은 동일 면적 이웃에 비해 적은데 겨울 난방비는 항상 두 배 이상 많았다. 낮에는 집에 사람이 없어 실내 온도를 낮추고 자주 사용하지 않는 방은 아예 밸브를 잠그는데도 방방마다 난방을 하는 4인 가족 동일 평수보다 요금이 더 나온다니. 관리사무소에서 지역난방 시스템에 대한 몇 가지 절약 팁을 알려줬고 계량기 점검도 했지만 달라지진 않았다. 온 국민을 깜짝 놀라게 한 12월분 명세서에는 한번도 본 적 없는 금액이 찍혔다. 난방비가 무려 20만원 늘었다.

몰아닥친 한파로 내달 나올 난방비 걱정에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부랴부랴 취약 계층 지원책을 발표했다. 정치권은 네 탓 공방에 열을 올리고 있다. 대통령실과 여당은 2021년부터 국제 에너지 가격이 치솟았는데도 전임 정부가 뭉개는 바람에 윤석열정부가 난방비 인상 부담을 떠안았다고 하고, 야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에너지 대란이 예고됐는데도 제대로 대비하지 않은 현 정부 탓이라고 한다.

세계일보

황정미 편집인


문재인정부가 가스·열 요금을 올린 건 지난해 대선이 끝난 4월이었다. 2021년부터 공급망 위기로 에너지 가격이 올라 많은 나라가 에너지 요금 인상 대열에 합류한 데 비하면 꽤 늦었다. 2021년 3월부터 2022년 3월까지 한국가스공사가 여덟 차례 요금 인상을 요청했으나 묵살됐다는 자료도 나왔다. 지지율, 선거를 의식한 처사라는 비판을 살 만하다. 정권 초 천명한 “5년간 요금 인상은 없다”는 ‘탈원전 도그마’에 사로잡힌 결과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에너지 가격을 예측하는 건 쉽지 않다. MMBtu(열량 단위·25만㎉를 내는 가스 양)당 2달러에 불과했던 천연가스 가격이 불과 2년 만에 70달러로 급등했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가 가장 컸다. 러시아가 가스 밸브를 잠그면서 당장 러시아산 파이프라인가스에 의존했던 유럽 국가들이 위기에 몰렸고, 이들 국가들이 천연가스 확보 경쟁에 나서면서 전 세계로 에너지 대란이 번졌다. 국내 사용 에너지 90% 이상을 수입하는 우리나라에 불똥이 튀는 건 당연하다.

러시아·우크라 전쟁으로 유럽이 가스 대란에 휩싸인 지난해 중순 정부는 “수급 차질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입장만 내놓았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정부가 겨울을 대비해 가스 탱크를 채우려고 상대적으로 비싼 현물(spot) 물량을 늘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실제 10%대 그쳤던 액화천연가스(LNG) 현물 구매 비율이 지난해 상반기에만 26%였다. 동북아 지역 LNG 현물 가격(JKM)이 MMBtu당 40∼60 달러를 오르내릴 때다. 중국이 2020년부터 장기공급계약 물량을 늘리고 유럽 각국이 2021년부터 에너지 요금 인상, 소비량 감축 방안 등을 내놓는 동안 정부는 뭐 했는지 묻고 싶다. 뒤늦게 밀린 숙제하듯 연료비 요금을 지난 한 해 40% 가까이 올려 ‘난방비 폭탄’ 사태를 불렀다.

국제 천연가스 가격 급등으로 가스공사가 도맡은 미수금이 지난해 말 9조원을 넘었다. 난방비 인상으로 미수금을 해소하는 구조를 감안하면 온 국민이 분담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싼 에너지 가격을 올려 국민들의 에너지 절약을 유도하고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적시에 에너지 자원을 비축하고 국민 부담을 분산시켜야 할 정부 책임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그때그때 수급 사정, 정권 입맛에 따라 에너지 정책이 달라지는 한 이번 사태 같은 일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장관, 기관 수장이 바뀌면 계약을 깨거나 재협상을 요구해 국제 가스 수급을 좌우하는 메이저 회사들로부터 신뢰도 못 받는다고 한다. 정치권은 네 탓 타령이나 ‘횡재세’ 같은 번지수 잘못 찾은 단기 처방으로 국민 여론을 호도할 게 아니라 정부 에너지 수급 정책부터 제대로 됐는지 따져야 한다. 에너지 안보는 국가 생존 기반이자 최소한의 국민 복지다. 전쟁이 해결되거나 날씨가 풀리기를 바라는 천수답 에너지 정책으로는 지킬 수 없다.

황정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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