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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3 (화)

    서독 ‘동독 인권 실태’ 차곡차곡 기록… 獨 통일 후 범죄가담 관료 공직서 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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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영 떠나 자료 축적·공개 적극적

    사례 4만7000건 형사처벌 증거로

    1989년 11월9일 오후 당시만 해도 독일 베를린을 동서로 가르고 있던 베를린장벽 앞. 동베를린 시민들이 무턱대고 장벽 앞으로 몰려와 “서베를린으로 넘어가겠다”고 요구했다. 그날 아침 동독 정부가 ‘주민들의 자유로운 여행을 허가하겠다’는 취지의 발표를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무리 여행을 자유화해도 동독인이 서독으로 가려면 출국허가증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장벽을 지키는 동독 경비병들 입장에선 허가증도 없이 서베를린으로 가려는 주민들은 총을 쏴서라도 막아야 했다. 그런데 경비병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미국의 독일 현대사 전문가 윌리엄 스마이저는 저서 ‘얄타에서 베를린까지’(2019)에서 왜 동독 경비병들이 그토록 무력했는지 설명했다.

    세계일보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 뒤 동·서베를린 시민이 나란히 장벽 위에 올라가 대결 종식을 자축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어떤 경비병도 마지막 ‘사회주의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서독이 ‘난민’에게 발포한 국경 경비병 명단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난민은 냉전 시절 몰래 베를린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한 동독 주민을 뜻한다. 1961년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이래 1989년까지 장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하다 사살된 이는 130∼200명에 달한다. 체포된 이도 3200여명에 이른다.

    당시 서독 정부는 서베를린 지역에 동독 경비병들의 인권 침해 실태를 감시하는 요원을 배치했다. 그들은 탈출 시도자에게 총을 쏜 경비병들의 신상 정보를 차곡차곡 기록해뒀다. 이는 동독이 붕괴하는 경우 과거에 자행된 인권 침해 범죄를 처단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동독 인권 실태 자료의 축적·공개를 위한 기록보존소에 대해 좌우 간 이견이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보수 성향의 기민·기사 연합(CDU-CSU) 집권기는 물론 진보 성향인 사민당(SPD)의 빌리 브란트나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정부를 이끌던 시기에도 동독 인권 문제에 대한 비판과 추궁에선 일관된 태도를 취했다.

    검사 시절 법무부 북한인권기록보존소장을 지낸 최기식 변호사는 2020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동독과 교류 협력을 강조했던 SPD 계열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기록보존소를 없애자는 얘기가 많았고 동독에서도 없애라고 요구했지만 계속 유지됐다”며 “기록보존소의 사례 4만7000건 정도가 나중에 통일 이후 형사처벌 증거 자료로 쓰이기도 하고, 일부는 동독 공무원의 재임용 선별 기준이나 피해자의 복권 자료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1990년 통일이 이뤄지고 난 뒤 독일은 그동안 축적한 기록을 토대로 인권 침해 범죄에 가담한 동독 관료들을 공직에서 추방했다. 범행 정도가 무거우면 형사처벌까지 가했다. 동독 시절의 판검사와 경찰관, 군인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 법무부에 따르면 옛 동독 판검사 2896명 중 3분의 2가량이 탈락하고 1094명만 재임용됐다. 판사는 1580명 중 절반 가까운 701명이 살아남았으나, 검사의 경우 1316명 중 25%가 조금 넘는 393명만 구제됐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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