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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르포] '화해와 상생', 비극 딛고 일어서는 제주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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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박태홍기자】 매년 수천만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찾는 '낭만의 섬' 제주도. 그러나 1945년 일제(日帝)로부터 해방된 이후, 희망에 찼던 제주가 겪었던 현대사의 비극은 제주에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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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에서 일어난 3·1 발포 사건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관덕정은 4·3 사건의 도화선이 된 '3·1절 발포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해방 후 제주가 고향이었던 사람들 6만명이 대거 귀국하면서 20만명 남짓이던 제주도의 인구 구조를 흔들었다.

귀환 인구의 증가로 인한 실직난, 콜레라 발병, 극심한 흉년은 도민들의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고, 미군정이 일제 경찰을 군정 경찰로 대거 등용하면서 민심은 더 흉흉해졌다.

그러던 1947년 3·1절 기념 대회에서 경찰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채였음에도 경찰이 조치를 취하지 않고 빠져나가자 성난 군중들이 이를 규탄하며 돌팔매질을 했고, 관덕정 광장 앞 망루에 대기하던 경찰이 총을 쏘면서 민간인 6명이 죽고 8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제주도민들은 이에 항의하며 관공서와 민간기업을 포함해 제주도 전체 직장 95% 이상이 참여하는 총파업에 돌입하면서 경찰의 무력 진압에 항의했다.

미군정은 제주도에 있던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세력들이 도민을 선동한다고 판단, 1948년 4월 3일 전까지 2500명을 구금하기에 이른다. 박경훈 제주도지사 후임인 유해진 지사는 서북청년단과 함께 입도했고 서북청년단은 급료를 지급 받지 않은 채 응원경찰과 함께 파업 주모자들을 검거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과정에서 1948년 3월 경찰의 고문치사 사건이 3건이나 발생하면서 사태는 악화된다. 남로당 무장대는 1948년 4월 3일 봉기해 제주도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했고, 그 사건으로 총 14명이 사망했다.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제주에 있던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측 김달삼이 '4·28 합의'를 통해 사태의 평화로운 해결을 합의했으나 우익청년단체에 의한 '오라리 방화 사건'이 발생하면서 합의는 틀어지게 된다.

이후 미군정에 의해 김익렬 중령은 해고되고 반공 성향이 투철한 박진경 연대장을 임명했지만, 문상길 중위 등 부하들에 의해 박 연대장은 암살된다.

3·8선 이남에는 미군이,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남북한 동시 선거 등 통일을 위한 논의도 진척되지 않자 미군정은 1948년 5월 10일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밀어붙인다. 하지만 제주도에선 투표 수 미달로 3개 지역구 중 2개에서 투표가 무효가 된다. 전국에서 선거가 무효가 된 지역구는 제주에서만 나왔다. 1948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첫 정부가 수립되고 다음달인 9월 북한에서도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정부에게 제주를 탄압할 수 있는 명분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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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븐숭이, 학살의 기억

제주 제주시 조천읍 북촌3길에 자리잡은 너븐숭이 4·3 기념관 옆엔 조그만 애기무덤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1949년 1월 17일 4·3 사건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북촌리 학살 사건의 피해자다.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서 2곳의 선거구가 무효가 된 것을 국가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됐고 당시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지휘하던 송요찬 9연대장은 그 유명한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가는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분류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엄연한 헌법 기반의 공화정부가 수립됐음에도, 법적 절차 없이 사람을 죽이겠다고 당당하게 선포한 것이다.

포고문 발표 이후 상황은 처참했다.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마을이 불살라지고 목숨을 잃는 피해를 입었다. 해안가 마을의 주민들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살기 위해 한라산에 입산하는 주민들이 늘어났고 군경의 진압은 갈수록 잔혹해져 가족들 중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고 그 부모와 형제 자매를 죽이는 대살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현기영의 단편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으로 유명한 제주 북촌리 학살 사건도 벌어졌다.

함덕에 주둔하던 2연대 3대대 군인들은 무장대의 공격으로 군인 2명이 숨진 것에 흥분해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주민들을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모아놓고 군경가족 등을 분류한 뒤 나머지 양민들은 집단 총살해버렸다. 이 과정에서 448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크고 작은 학살 사건을 포함해 제주 4·3 사건에서 3만명(당시 제주 인구 2만5000~3만명의 10분의 1)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무장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벌어졌다. 4·3 사건 희생자 중 10%는 무장대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4·3사건을 4·19 혁명이나 5·18민주화운동처럼 정의 내리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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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이념의 굴레

일제강점기 고구마 주정으로 비행기 연료를 만들던 주정공장은 4·3 사건 당시 하산하거나 귀순한 제주도민을 대거 감금하던 수용소 역할을 했다. 1949년 봄, 대거 산에서 내려온 도민들은 열악한 환경과 혹독한 고문에 고초를 겪었다. 이곳에 수용됐던 청장년층 대부분은 육지의 형무소로 이송됐고 이들 중 다수가 한국전쟁 후 집단학살됐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됐다가 수용됐던 많은 사람들도 수장되거나 정뜨르 비행장에서 학살됐다. 일본 대마도에선 4·3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제를 지낸다. 1950년 일본 대마도 해변에 1950년 예비검속으로 수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 수백 구가 떠밀려 왔기 때문이다.

일본 패망 직전, 제주도는 연합군의 본포 상륙을 막기 위한 최후의 기지였다. 일본군은 제주도 전역을 요새화하고 군사기지를 만드는 등 국토를 훼손했다. 미군의 폭격을 받아 파괴된 섯알오름 자리에서 주민 수백명은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해방 후 이어진 4·3의 굴레는 지속적으로 주민들을 괴롭혔다. 송악산과 삼방산이 보이는 섯알오름에서 한국전쟁 예비검속으로 인한 학살이 벌어진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당시 보도연맹원들을 전국적으로 체포하고 구금했는데, 제주도 서귀포 대정읍에 있는 섯알오름 탄약고 자리 구덩이에서 주민들이 집단 총살해 212명이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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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투쟁, 세계기록유산으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상징되는 강력한 반공 통치 아래 4·3 희생자와 유족들은 기억 투쟁에 나서야 했다. 제주도민들은 비극적 현대사에 대해 잠시 입을 다물었을 뿐,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자식의 희생을 잊지 않았다.

민주화가 되고 나서야 4·3 사건은 점차 공론화될 수 있었으며 김대중 정부 때 4·3 특별법 제정으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노무현 정부 때는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가 발간됐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시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며 공식 사과했다.

2013년 '4·3 희생자 유족회'와 '경찰 재향경우회'는 화해와 상생을 선언했고 2021년 4·3 특별법 전부 및 일부개정으로 희생자 보상, 4·3 군법회의 수형인 직권재심 등 희생자와 유족의 실질적 피해회복과 명예회복 노력으로 국가차원의 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4·3 사건 75주년을 맞은 제주는 아픈 상처를 딛고 4·3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으로 '평화와 인권, 화해와 상생'이라는 제주의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려는 본격적인 준비를 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기록유산 보존에 대한 위협과 이에 대한 인식을 증진하고, 세계 각국의 기록 유산의 접근성을 향상하기 위해 1992년부터 진정성, 완전성, 세계적 중요성, 독창성 또는 희귀성, 보존상태 등을 중점적으로 심사해 지정하고 있다.

'4·3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등재추진위원회(추진위)'는 지난달 20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출범식을 열고 4·3을 세계 역사에 남기기 위한 대장정에 돌입했다.

4·3 사건 관련 등재 대상 기록물은 약 3만건으로, 행정부·국회, 군·경 기록, 재판기록, 미국기록, 언론기록 등 제주 4·3 당시 기록과 희생자 결정, 도의회 희생자 조사기족, 진상규명, 증언, 화해와 상생 관련 등 제주 4·3 이후의 기록이다.

추진위 측은 "세계적 냉전과 한반도 분단이 남긴 역사의 기억이며 도민들의 자발적인 화해와 상생의 노력으로 국가폭력의 극복과 해결을 이뤄낸 전세계 과거사 선도적 해결 사례의 총체적 기록물로 평가한다"고 추진 배경을 밝히고 있다.

등재를 위해선 문화재청 공모에 신청하고 선정돼야 하는데, 문화재청은 세계기록유산 한국위원회 심사를 거쳐 올해 4월 말 기록물 2건을 선정한다. 향후 선정된 기록물은 24년 상반기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신청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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