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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오세훈 재개발’ 몰린 필동 인쇄골목…“내일도 일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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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지구 재개발로 붕괴 위기

한겨레

인쇄업체를 운영하는 신병태 대표가 지난 16일 서울 중구 충무로의 인쇄공장에서 완성된 인쇄물을 들여다보고 있다. 손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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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충무로역을 나와 골목으로 들어서니 ‘○○인쇄’, ‘◇◇출판’, ‘△△제본’이라 적힌 간판들이 즐비했다. 1층은 기계가 있는 공장, 2~3층은 인쇄업체 사무실이 입주한 낮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골목 사이사이에는 ‘복합건물 공사’라고 적힌 가림막에 둘러싸여 하늘로 치솟는 고층건물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서울의 대표적 노후건물 밀집지대로 꼽히는 이곳은 서울 제조업을 견인하는 인쇄업자들의 땀과 눈물이 만들어낸 동네, 중구 인쇄거리다.

■ “여기가 조선시대부터 활자 만들던 동네”


인쇄는 산업집적이 필수다. 기획, 프리프레스(제판 등), 인쇄, 후가공 등 인쇄물 하나를 만드는 데 필요한 다양한 공정이 각기 다른 업체들에 의해 연쇄적으로 이뤄진다. 이들이 한 거리에 모여 일하는 이유다. <한겨레>는 지난 16일 서울 중구 인쇄거리를 찾아가 세운지구 재정비 개발사업으로 붕괴 위기에 처한 인쇄산업 생태계를 들여다봤다.

충무로에서 인쇄업체를 운영하는 신병태(70) 대표는 1978년 신당동 청계천8가 옆 주택가 인쇄공장에 처음 발을 들이던 시절을 기억한다. 공장 앞에 매일같이 큰 화물트럭이 와서 인쇄물을 잔뜩 실어 갔다. 유신정권 말기라 사회 분위기는 어두웠어도 거리 전체엔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45년을 인쇄업자로 살아온 신 대표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업체에 납품을 하러 찾아갔더니, 인쇄물을 5층까지 옮겨달라고 했다. 직원과 둘이서 승강기도 없는 건물 계단을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내렸다.

“인쇄물을 겨우겨우 다 옮겼어요. 그랬더니 ‘왜 5층으로 가져왔어? 지하로 갔어야지’ 그래요. 온몸에 맥이 다 풀리면서 ‘굳이 이런 대우 받아가며 일을 해야 하나. 이거 아니면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인생의 절반을 인쇄업에 쏟아부은 신 대표에게 얼마 전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이번엔 말 그대로 사업을 완전히 접어야 할지 모른다. 도심 재개발이 몰고 온 위기다. “전쟁이나 지진이 나서 공장이 무너지면 다시 지어 시작하면 됩니다. 그런데 아파트가 들어서 봐요. 다 쫓겨납니다. 그걸로 끝이에요. 여기가 그래도 조선시대부터 활자 만들고 책 찍어내던 주자소가 있던 동네인데. 쫓겨나면 다 끝입니다, 끝.”

■ 5500여 업체가 이룬 촘촘한 산업생태계


재개발을 한다는데, 분업과 협업이 필수인 도심의 인쇄산업 생태계를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지에 대해선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주대책도 없다. ‘45년 인쇄쟁이’로선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물론 인쇄골목 소상공인들이 무작정 개발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도심 제조업을 지키고, 삶을 지금처럼 유지하게 해달라는 게 이들 요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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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찾은 서울 중구 충무로 일대 골목의 모습. 각기 다른 역할을 맡는 다양한 인쇄업체들이 모여 있다. 손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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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인쇄인들의 불안은 더 크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8년 전 장인이 해온 인쇄소를 이어받은 서동렬(42) 대표는 “보다시피 여기 건물이 다 노후화됐다. 개발하는 건 나쁘지 않다”면서도 “언제 우리가 돈으로 보상해달라고 했나. 개발이 되더라도 사업을 계속할 수 있게 대책을 세워달라는 거다. 인쇄업이라는 게 혼자 움직여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 같이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인쇄인 집안에서 자란 고성진(40) 대표는 “제 사무실은 여기서 몇 블록 떨어진 필동인데, 저와 같이 일하는 협력업체가 이 일대에 굉장히 많다. 이들이 사라져버리면 저도 일을 할 수가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인쇄인들이 ‘함께 살고, 함께 죽는 수밖에 없다’고 호소하는 이유는 을지로와 충무로 일대의 업체들이 촘촘한 산업네트워크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공정과 업무를 이 지역에 산재한 소공장들이 분업하는 체제다. 당장 내 공장은 자리를 지키더라도 다른 공장들이 사라지면 사업을 유지하기 어려운 구조다.

서울시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에 따르면 서울 중구에 있는 인쇄업체는 5500여곳으로 종사자 수만 1만4176명에 달한다. 서울시내 인쇄산업의 60%를 차지하는 규모다. 조선시대 주자소가 자리잡았던 이 일대엔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며 인쇄 관련 업체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거대하고 촘촘한 산업생태계를 이뤘다.

이곳에선 오랜 기간 다져진 전문성과 지리적 집적·집중의 이점을 활용해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고, 규모가 작거나 기한이 촉박한 초단기 주문도 수월하게 소화한다. 신병태 대표가 이곳을 “오후 5시에 주문이 들어와도 아침 9시면 납품할 수 있는 곳”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근거다. 경기도 파주시에도 인쇄단지가 형성돼 있지만 대규모 주문을 주로 맡아 중구 인쇄거리와는 특성이 다르다는 게 신 대표의 설명이다.

“이곳이 무너지면 소비자들 피해도 클 겁니다. 여기에 맡길 수 있던 일을 파주까지 가서 처리하게 되면 오가는 용달비도 비싸지고, 소량 인쇄는 금방 받기 어려울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서 밀려난 인쇄업체들이 가까운 지역에 어찌어찌 웃돈을 주고 공장을 차린다고 합시다. 늘어난 비용만큼 가격도 올라가지 않겠어요?”

■ 44년 된 정비구역…오세훈 시장 취임 뒤 재개발 가속


세운지구 재정비 개발계획이 새로운 소식은 아니다. 서울시는 1979년 처음 이 일대를 정비구역으로 지정했다. 무려 44년 전 일이다. 2009년 오세훈 시장이 통합 개발 계획을 내놓았고, 박원순 시장이 당선되면서 소규모 정비계획으로 바뀌었다. 이후 오세훈 시장이 돌아오면서 다시 통합 개발 계획을 꺼내들었다. 오 시장은 지난해 프랑스 파리의 재개발 지역인 리브고슈를 방문해 세운지구의 높이 제한을 완화하고, 정비구역을 통합하는 구상을 발표한 바 있다. 내년에 첫 삽을 뜨는 것이 목표다.

서울인쇄조합은 “서울시가 제시한 개발 청사진을 보면 재정비 구역 안에 있는 3천곳이 넘는 인쇄업체들은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도심도 재정비하고 산업생태계도 보존할 수 있게 이주단지 조성 같은 산업대책도 함께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쪽은 “곧 공개될 계획안에 소상공인 이주대책과 도심 산업 보호대책도 포함될 예정”이라며 “계획안 열람공고가 시작되면 지역 소상공인의 의견도 받으려고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서울시가 공공임대 건물 조성 등 단순 이주비 지원을 넘어서는 수준의 산업생태계 보호대책을 내놓을지는 미지수다. 서울시 계획안은 다음달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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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일대 인쇄거리에서 완성된 인쇄물을 가져가기 위해 차량이 서 있는 모습. 서울시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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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세운지구를 정비해 달성하려는 목표는 ‘직주근접’이다. 일터와 주거지를 가깝게 만들어 이동에 필요한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도심 공동화를 막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올해 발표된 ‘서울 도심 기본계획 보고서’를 보면 도시재정비촉진지구를 바탕으로 정비사업을 확대해 상주 인구를 10만명 추가 확보하겠다는 구상이 적혀 있다. 문제는 이 경우 도심에 들어와 살 수 있는 이들이 높은 집세를 감당할 수 있는 계층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심한별 서울대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선임연구원(도시계획학 박사)은 지난 16일 열린 ‘중구 인쇄인 생존권 수호를 위한 대토론회’에서 “서울시는 우선적으로 주거용 건물을 공급할 것”이라며 “교통도 편리하고 소위 ‘좋은 주거’가 들어설 확률이 높다. 분양가가 얼마나 비싸겠느냐”고 반문했다.

■ “어제처럼 내일도 일하고 싶다”


서울시가 계획하는 ‘직주근접’이 큰 의미가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 박은선 서울과학기술대 연구교수(도시공학 박사)는 토론회에서 “직주근접의 논리는 교외와 도심의 거리가 기본 3시간 정도 걸리는 미국에서 나오는 이야기”라며 “서울은 이미 도심까지 1시간 안에 못 가는 곳이 없다. 유럽에서는 서울시를 직주근접 모델이라며 견학을 온다”고 강조했다.

인쇄인들이 바라는 것은 단순하다. 어제처럼 내일도 일하는 것이다. 고성진 대표는 말했다. “좋은 처우나 환경은 바라지 않아요. 일만 하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대책을 함께 말하면서 (개발을) 진행하는 것도 아니고, 소상공인 피해에 대해선 아무 생각이 없잖아요. 그게 제일 속상합니다.”

손지민 기자 sj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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