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하지 못한 태평양
현재까지도 방사성물질 다량 검출…미국은 피해 주민들에 대한 배상금 지불도 거절
트라우마에도 ‘일본 오염수’ 입장 갈려…“강대국들의 경제 원조에 의존 때문” 지적
1946년 7월 서태평양 미크로네시아의 마셜 제도 북부에 있는 비키니 환초 해역에서 미국이 실시한 핵실험으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다. 미 의회 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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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현지시간) 일본과 바다를 두고 약 7800㎞ 떨어진 남태평양 섬나라 피지공화국. 수도 수바의 벼룩시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백명이 모였다. 전날 시작된 일본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방사능 오염수 해양 방류에 항의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었다.
현지 매체인 피지빌리지와 피지타임스 등에 따르면 피지 비정부기구(NGO) 연합이 조직한 이날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은 “후쿠시마 오염수 태평양 투기를 중단하라” “태평양 사람들의 생명도 소중하다”고 적힌 현수막과 팻말을 들고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했다. 국회 앞에서는 도쿄전력의 오염수 해양 방류를 공개 지지한 시티베니 라부카 피지 총리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시위에서는 “일본은 돈도, 쓰레기도 가져가라”는 구호가 울려퍼졌다. 일본 정부가 개발원조를 약속하며 오염수 방류에 대한 동의를 구한다는 비판이다. 페미니즘 단체 ‘평등을 위한 디바’의 대표 노엘레네 나불리부는 국제사회가 태평양을 원치 않는 위험물을 쉽고 편리하게 처리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선 안 된다면서 “단기적인 경제적 이익 때문에 태평양 지역의 우려가 간과되고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 언론이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 소식을 타전했지만 피지 시위를 보도한 곳은 거의 없었다. 한국과 중국의 반응을 주요하게 다룬 것과 대조적이다. 태평양에는 원자력발전소도 핵 개발국도 없다. 하지만 ‘핵 식민지의 역사’가 여전히 진행 중인 이곳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글로벌 핵 문제의 가장 큰 피해자다.
1945년 8월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태평양의 여러 섬을 전화로 몰아넣은 전쟁은 종결됐지만, 태평양 핵 수난사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냉전 시대로 접어들며 강대국의 핵 개발 경쟁이 벌어지면서 태평양이 미국과 프랑스, 영국의 주요 핵실험장이 된 것이다.
적도 인근 필리핀과 하와이 사이에 있는 마셜제도가 대표적인 곳이다. 마셜제도는 19세기 독일의 식민지였다가 일본이 1차 세계대전 중 빼앗았고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다시 점령하면서 미국령이 됐다.
소련과 군비 경쟁을 벌이던 미국은 1946~1958년까지 마셜제도 비키니섬에서 21차례 핵실험을 했다. 1992년까지 미국이 실행한 핵실험 1054건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문제는 위력이다. 히로시마 원폭보다 1000배 강력한 미국 최초의 수소폭탄 ‘캐슬 브라운’을 포함해 위력이 강한 핵폭탄 실험이 주로 마셜제도에서 이뤄졌다. 미국의 핵실험에서 발생한 에너지양의 절반 이상이 마셜제도에 집중됐다. 미국은 비키니섬 주민들을 인근 섬으로 이주시키면서 핵실험이 위험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린 컬럼비아대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마지막 핵실험이 끝난 지 6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마셜제도 11개 섬에서 아메리슘241과 세슘137 같은 방사성물질이 검출된다. 방사성물질 검출량이 후쿠시마의 10~1000배에 이르는 곳도 있다. 주민 82만명이 피폭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국 간 핵 피해 분쟁 중재를 위해 1988년 설치된 국제재판소는 “피폭으로 인한 암은 유전되며, 마셜제도 사회 전체가 핵과 관련된 암 목록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마셜제도는 1979년 미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방사능 피해는 핵실험 이후 태어난 현재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국제재판소는 미국이 피폭 피해를 입은 마셜제도 주민들을 위해 재정착 및 의료비 지원으로 23억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미국은 배상금 지급을 거부했으며 1998년 섬 주민들의 암 치료비 지원도 중단했다. 마셜제도와 미국은 올해 배상금 재협상을 앞두고 있다. 미국이 남겨두고 간 방사성물질의 처리도 민감한 협상 대상이다. 미국은 핵실험 후 남은 방사성물질을 시멘트돔에 밀봉하고 떠났지만 최근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돔의 침수 및 누수로 인한 방사성물질 누출 위험이 문제가 되고 있다.
비키니섬 주변의 해양 오염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비키니섬은 핵실험 중단 10년 만에 산호초가 자라면서 ‘비키니 환초’가 형성됐다. 미 스탠퍼드대 해양생물학자 스테판 플럼비는 “원자폭탄을 바다에 투하한 것은 우리가 바다에 행한 가장 파괴적인 일이었지만, 바다는 다시 살아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엉망”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마셜제도의 거북이 등딱지가 방사성물질로 오염됐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프랑스 역시 1966년부터 1996년까지 과거 식민지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에서 200회 가까운 핵실험을 했다. 프랑스 군은 1966년 7월2일 폴리네시아의 무루로아 환초에서 첫 비밀 핵실험을 실시한 이후 30년 동안 193회의 핵실험을 이 지역에서 실시했다.
특히 1974년까지는 핵폭탄을 공중에서 터뜨리는 방식으로 실험해 타히티섬 주민 등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1968년 풍선에 매달아 폭발시키는 방식으로 진행한 2단계 열핵실험의 위력은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200배에 달했다. 공중 핵실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프랑스는 핵실험 장소를 지하 핵실험으로 변경했다.
프랑스 온라인 탐사보도 매체 ‘디스클로즈’와 미국 프린스턴대 소속 과학자, 영국 환경 범죄 조사 기관 인터프르트가 기밀 해제된 군 문서를 바탕으로 조사한 결과 핵실험 당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주민 12만5000여명의 90%에 해당하는 11만명이 피폭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피해 규모는 프랑스 정부가 피폭 피해자로 제시했던 1만명의 11배에 달한다.
이 같은 역사는 오염수가 안전하다는 일본 정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고스란히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프랑스가 마지막 핵실험을 했던 해에 7세였던 타히티섬 주민 히나모우라 크로스는 호주 ABC방송과 인터뷰하면서 “타히티섬에는 아픈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암이 없는 가족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마셜제도 주민인 알손 켈렌도 최근 가디언과 인터뷰하면서 “나에게 핵에 관해 이야기한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였다”며 핵물질을 바다에 방류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셜제도에서 피폭 문제를 연구하는 다케미네 세이이치로 메이세이대 교수는 도쿄신문과 인터뷰하면서 “마셜제도를 포함한 태평양의 섬들이 오염수 해양 방류에 반대하는 것은 지금까지 강대국들이 바다를 핵실험이나 핵폐기물 장소로 마음껏 사용해 온 역사를 근거로 한다”며 “태평양 섬 사람들은 방사성물질의 양이 설령 소량이라 하더라도, 일본이 자신들과 무관하게 오염수를 태평양에 흘리는 행위를 용서할 수 없다며 분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는 단순한 바다일지 모르지만, 태평양 섬 사람들에게 바다는 생활의 양식 그 자체”라고 말했다. 피지빌리지는 피지 어민들이 수십년 후에도 주된 수입원인 참치잡이 어업을 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는 수바수산협회의 우려를 전했다.
그러나 이 같은 뿌리 깊은 역사적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태평양 도서지역 정부들의 입장은 분열했다. 피지와 팔라우, 파푸아뉴기니, 쿡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은 ‘우려는 있지만 수용하겠다’며 공개적으로 일본의 방류 결정을 지지했다. 반면 바누아투와 투발루, 솔로몬제도는 끝까지 반대했다. 회원국 의견이 갈리면서 애초 오염수 방류에 강한 우려를 보여온 태평양도서국포럼(PIF)은 공식적 찬반 입장을 내놓지 못했다.
태평양의 분열은 ‘지정학 대결’의 영향으로 해석됐다. AFP통신은 2019년 대만과 단교한 후 중국과 밀착하고 있는 솔로몬제도와 집권 시절 친중 정책을 펼쳤던 피지 야당 등을 예로 들며 “중국의 태평양 동맹국들이 오염수 방류 비판을 주도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태평양 교회협의회 사무총장인 제임스 바그완은 “부채 외교의 한계”를 지적했다. 태평양 국가들은 핵 실험으로 인한 피폭 피해와 환경재앙의 피해자이지만, 이 피해를 해결하기 위해 강대국의 경제적 원조를 받아야 하고 원조 때문에 독립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아이러니한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PIF는 11월 총회를 거쳐 다시 입장을 정할 계획이다. 올해 초 의회 결의안을 제출한 마노아 카미카미카 피지 부총리는 “태평양 국가로서 우리가 더 큰 국가들의 쓰레기 처리장이 될 수 없다”며 “이러한 무책임한 행동이 사회·경제에 미칠 영향은 재앙적”이라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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