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7.01 (월)

이슈 천태만상 가짜뉴스

[모던 경성] 경성에도 번진 가짜뉴스 ‘조선인폭동說’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뉴스라이브러리속 모던 경성] ‘道義를 아는 우리가 어찌 남의 불행을 이용할까’ 社說로

일침

조선일보

일본 시민단체 봉선화의 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이사가 지난 2013년 8월 도쿄에 있는 관동대지진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 옆에서 학살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 후 봉선화 대표를 맡은 니시자키씨는 학살 100주년을 맞은 지난 8월에도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조선인학살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1923년 9월,ㅣ 경성에도 조선인이 일본인들을 습격한다는 ‘가짜뉴스’가 돌았던 모양이다. ‘근일 시내에서 일본인간에 발현한 사실의 일이(一二)를 문(聞)하건데, 조선인이 금번 동경의 진재를 이용하여 일본인을 습격한다는 허황무근한 풍설이 유(有)하야 본정서(本町暑) 관내 어떤 마을에서는 소위 자위단이라는 방어단체를 조직하려고 협의중에 있음을 경찰서에서 문지하고 해산을 명하였다 하니…'(조선일보 1923년9월24일자 사설)

경성의 일부 일본인들이 조선인의 습격을 대비해 ‘자경단’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서 경찰이 막았다는 얘기다.

사설은 ‘감히 일언으로써 일본인 제군에게 주노니 정청(靜聽)하고 심사(深思)할 지어다’라고 운을 뗀 후, ‘우리 조선인이 비록 잔열무능하여서 현 지위에 거(居)하였으나 도덕을 숭상하고 자선을 낙위(樂爲)함은 절대로 인(人)의 배후에 입(立)코처 하는 자가 아니라…감히 무리한 추측을 우리에게 행하야 평지풍파를 일으키고자 함이 과연 무슨 견지에서 나온 망동(妄動)인가’라고 질타했다. 이어 ‘도의를 아는 조선인으로서는 남의 불행을 행(幸)히 함은 결코 없으리니 일본인들아 자중하라’고 점잖게 마무리했다. 이 사설 제목은 ‘일본인들아 자중하라’였다.

조선일보

2013년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관동대지진 조선인피살자 명부. 이승만 정부때 작성한 기록으로 290명이 수록돼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참사 직후 ‘사회주의자 경계’

1923년 9월1일 11시 58분, 규모 7.9 강진이 동경 일대를 습격했다. 요코하마, 가나가와현·도쿄도 등 관동(關東·간토) 일대에서 10만5000명이 사망·실종하고 건물 10만9000채가 무너지고 21만2000채가 불탔다. 참사의 한복판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가짜 뉴스’가 유포됐다. 재난의 원인을 조선인탓으로 돌려 불만을 해소하려는 일부 일본인들의 계략이었다.

관동대지진 소식은 비교적 빨리 한반도에 전달됐다. 조선일보는 9월3일자 석간부터 ‘일본 유사이래 초유의 대지진’ ‘동경역은 4,5건물뿐’ 등 지진 참상을 자세히 보도했다. 3면 절반을 할애한 이날 신문에서 특이한 점은 ‘동경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은 회합을 할 모양임으로 경시청에서는 방금 엄중히 경계하는 중’이라는 짤막한 기사였다. 해군대장 출신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 権兵衛) 신임 총리 암살설까지 같은 지면에 실려 흉흉했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맴돌았다.

◇북청 출신 유학생 이주천의 목격담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소식은 사건 발생 직후부터 조선에 전해졌다. 일본에는 유학생과 생계를 잇기 위해 건너간 노동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함남 북청군 청해면에 사는 스물여덟살 일본 유학생 이주천은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집에 왔다가 개학을 맞아 현해탄을 건넜다.

‘내가 부산에 도착하기는 8월30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으로 연락선을 타고자 하였더니 만원이 되어 타지 못하고 그 이튿날에야 겨우 타고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에 상륙하였습니다. 거기서 기차를 탄 조선 학생이 20명 가량 되었는데 명고옥(名古屋, 나고야)에 도달한 즉, 신문 호외가 굉장하며 동경이 전멸되었다 하고 겸하여 동해선은 타지 못한다고 합디다. 그러나 동경이 전멸이라 함은 꿈같은 일인고로 그대로 중앙선을 타고 들어가다가 동경을 앞으로 60리를 격한 천구까지 가매, 몸에 피투성이를 한 사람이 많이 타며 동경 이야기를 하는데 소름이 끼치고 화광(火光)은 그때까지 중천(中天)에 비추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행 20명은 임시회를 열고 사고무친척한 동포의 소식을 듣고자 모험을 하고 들어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계엄령이 내리고 동경에 들어오는 사람은 절대 거절을 한다함으로 눈물만 남기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중도에 귀환한 유학생’, 조선일보 1923년9월8일)

1923년9월1일 현해탄을 건넌 이주천은 나고야에 도착했을 때쯤, 관동대지진 호외를 접했던 것같다. ‘동경 전멸’이란 충격적 뉴스였다. 이주천은 동승한 조선 유학생 20여명과 함께 동경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동경 근교 가와사키(川崎)에서 피투성이 차림의 이재민들이 승차해 대지진의 참상을 전했다.(신문엔 ‘천구’라고 썼지만, ‘천기’(川崎, 가와사키)의 오자인 듯하다) 창밖엔 불빛이 치솟았다. 계엄령이 내린 동경엔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이주천은 동경의 동포 소식은 알지못한다면서도 “신문 호외에 품천(品川, 시나가와)에서 조선동포 300명을 OO하였다는 기사를 보았다”고 전했다. 생생한 목격담이었다.

조선일보

관동대지진을 보도하다가 총독부 검열에 걸려 삭제된 조선일보 1923년 9월5일자 지면.


◇총독부의 잇단 압수, 삭제

조선총독부는 보도 통제에 들어갔다. 9월3일 발행한 조선일보 호외 중 ‘조선 총독에도 경계’ ‘횡빈(橫濱, 요코하마)에도 OO사건 발발’기사는 압수당했다. ‘3개처에 불온 사건 발생’(9월5일) ‘중도에 귀환한 유학생’(9월8일) ‘조선인의 폭행은 절무(絶無), 경시청이 조사한 보고에도’(9월24일) ‘임시정부에서 항의제출’(10월4일)…. 압수나 발매금지 당한 기사 중에는 당국의 지시 직전 일부 인쇄된 신문에 기사가 실리거나 총독부 검열문서에 일본어 번역본이 실려있어 그 면모를 알 수있다. 동아일보 9월9일자 기사 ‘불바다에서 탈출하여 무사귀국까지’도 압수당했다. 이 기사는 ‘일본인들은 동경을 향하는 열차에 대고 동경에 가면 조선인을 OO하라’는 고함소리를 질러 소름이 끼쳤다’는 증언을 실었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피해 규모는 지금까지도 분명치 않다. 혼란 와중에 사망자를 화장해버리거나 유해를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섬나라 근성 강한 일본에서 무슨 살길을 도모하느냐며 조선인 전원귀국을 호소한 조선일보 1923년10월4일자 사설 '교일동포에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섬나라 근성 강한 일본에서 무슨 生을 도모?”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까지 비화됐다. 참변의 출발점이 식민지배에서 시작됐다는 주장이다. ‘그들의 당한 금번 불행참변이 우리의 민족적 불행을 축소한 호(好)표본이라는 것이다. 이 참변의 출발점이 지배와 압복(壓服)의 관계에 있는 양 민족의 현재 경우이었지만 그 참변이 있은 이후에 그 감정이 더욱 악화하였을 것은 무엇으로도 엄폐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에 이미 패도(敗倒)하여 죽음을 피치 못한 동포의 고혼을 비분의 누(淚)로써 조(吊)하는 동시에 일본에 재류하는 우리 동포들의 보다 더 혹독한 곤액(困厄)과 고초를 상상하고 누(淚)가 진(盡)하고 성(聲)이 시(嘶)함을 금치 못한다.’

조선인 학살에 분노한 사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헛되이 강자의 정치치율을 신(信)하려함이 아니지마는 하등의 생활권의 보장이 없는 그들의 몸으로써 저 도국(島國)적 근성에 기유하야 민족적 감정이 강렬한 일본인의 틈에 끼여서 그 무슨 생을 도모할 가망은 절대로 없을 줄 믿는다’고 썼다. 식민 지배자를 향해 ‘섬나라 근성’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지금 다시 읽어봐도 섬칫할 정도다.

◇”모두 포기하고 급거 귀국” 권고

사설은 유학생, 노동자에게 즉시 귀국하라는 호소로 이어졌다. ‘이에 우리는 일언(一言)으로써 읍권(泣勸)하노니 이번 진재에 겨우 생존을 얻은 동포이나 그 곤액을 당하지 아니한 타 지방에 재류하는 동포가 다 노동자이나 학생이나 노동도 학업도 무엇무엇도 모두 다 포기하고 무엇도 고견(顧見)할 것없이 극래(亟來)하고 거귀(遽歸)하라는 것이다.’ 사설은 ‘일본만이 어찌 우리의 수학지(修學地)이며 노동의 공급지이리오’라고 호소했다.(이상 ‘僑日동포에게’, 조선일보 1923년10월4일)

100년전 비극의 현장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행방을 찾을 수없고 목격자들의 증언과 기억은 마모돼가고 있다. 소수이지만 일부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조선인학살의 기억을 되살리고 추모사업에 나서는 데서 희망의 기운을 찾을 수있다. 하지만 관동대지진 100주년을 추모하는 도쿄도(都)내 행사 10여개 중 조선인학살 언급은 없다는 보도(’도쿄都 ‘관동대지진 기억하자’ 10개 행사, ‘학살’은 언급 없어’, 조선일보 2023년9월1일)엔 가슴이 답답하다. 미래를 함께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기억의 회복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정진석 편,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모음 1,2, LG상남언론재단, 1998

강덕상 지음, 홍진희 옮김, 조선인의 죽음, 동쪽나라, 1995

조선 뉴스라이브러리 100 바로가기

※'기사보기’와 ‘뉴스 라이브러리 바로가기’ 클릭은 조선닷컴에서 가능합니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