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8 (금)

이슈 끊이지 않는 학교 폭력

“밀어내도 나아간다”···‘성소수자 권리’ 분투하는 미국 텍사스 시민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텍사스주는 정치적·문화적으로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이지만 대도시인 휴스턴은 진보 성향이 우세하다. 휴스턴이 텍사스주 내 다른 지역에 비해 성소수자를 포용하는 문화와 제도가 앞서 있는 배경이다. 하지만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와 주의회를 장악한 공화당 의원들이 성소수자 권리를 후퇴시키는 법안을 속속 통과시키면서 휴스턴 성소수자 사회의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다. 미국 전역의 주의회에 제출된 성소수자 억압 법안 500여건 가운데 20%에 해당하는 100여건이 텍사스에서 발의됐고, 이 중 최소 25건이 통과된 상태다.

미국은 연방 차원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고, 증오범죄를 처벌하는 법률도 제정돼 있다. 동성결혼이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차별금지법이 16년 넘게 국회 문턱을 통과하지 못한 한국과는 사뭇 다른 환경이다. 그렇지만 텍사스처럼 보수 정부 주도로 성소수자 권리를 억압·후퇴시키는 지역에서는 이에 맞서는 시민사회의 운동도 활발해진다는 점에서 두 사회가 맞닿아 있다. 경향신문은 주한미국대사관이 후원한 ‘LGBTQI+(성소수자) 인권 스터디 투어’에 참여해 지난달 24일(현지시간)부터 사흘간 휴스턴을 방문했다.

경향신문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라틴계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OLTT 활동가 지아 파체코가 시민들이 주정부의 반(反) 성소수자 정책에 반발해 연 시위를 소개하면서 보여준 사진이 모니터에 띄워져 있다. 휴스턴 | 박하얀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논쟁 대상이 된 성소수자 ‘권리’


“저는 많은 사람 앞에 서는 것도, 카메라도 싫어하지만 이게 필요한 일이란 건 알아요. 어느 누구도 매일 싸우고 싶진 않겠지만, 투쟁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싸워나가는 것이죠.” 라틴계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OLTT(Organización Latina de Trans)의 지아 파체코 프로그램 디렉터의 말이다.

미국에서 트랜스젠더의 권리는 연방대법원이 지난해 폐지한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와 함께 뜨거운 논쟁거리이다. 특히 공화당은 아동·청소년의 호르몬 치료나 성전환(성확정)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 애벗 주지사는 호르몬 치료를 받는 아동의 부모를 아동학대 혐의로 수사토록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유력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모든 주에서 어린이의 성전환을 금지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파체코는 “의사들이 호르몬 치료 중인 청소년들에게 1년치 약물을 처방해 주고 향후 어떻게 할지 모색하고 있다”면서 “(호르몬 치료가 허용되는) 다른 주나 국가로 이동해 성소수자 자녀의 치료를 계속하는 것을 고민하는 부모들도 있다”고 말했다.

OLTT는 2015년 성소수자 친화적인 행사가 열린 휴스턴의 한 공공시설에서 트랜스젠더 여성들의 화장실 출입을 금지한 사건에 항의해 라틴계 이민자 트랜스 여성 70여명이 모인 것을 계기로 설립됐다. 이 단체는 거처가 없는 성소수자 이민자, HIV 감염인 등에게 임시 주택을 제공하고, 50세 이상 트랜스 여성들의 모임 등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운영한다.

경향신문

지아 파체코 OLTT 활동가는 “트랜스젠더 평균 연령이 37세 정도로 연장자들이 많이 없어 시니어 트랜스젠더들에게 존경심을 표하고 이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휴스턴 | 박하얀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단체는 성소수자의 법적 성별 정정을 위한 의료적·행정적 절차도 지원한다. 텍사스는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성소수자 이민자 유입이 적지 않다. 파체코는 “중남미에선 태어난 성 그대로 지키라는 생각이 팽배하다”면서 “성 정체성 때문에 학대당해 미국으로 망명 신청을 하는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최근엔 성별 정정을 허용하지 않는 온두라스에서 온 이들이 많다고 파체코는 설명했다.

‘외과적 수술’ 여부가 법원의 성별정정 허가에 영향을 미치는 한국과 달리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는 외과수술이 필요 없다. 이 단체는 성확정을 원하는 당사자가 호르몬 치료를 받도록 지원하고, 치료가 시작되면 병원에서 확인 서류를 받도록 한다. 이후 청구서를 작성해 주정부에 제출하고 판사가 서명한 명령서를 최종 수령하면 성별이 정정된 신분 확인 증빙서류를 받을 수 있다.

경향신문

‘해치 유스’ 활동가들이 성소수자 청소년들과 함께 꾸민 공간. 활동가 젠 브록은 “서로 무조건적으로 포용하고 지지하는, 안전하고도 즐거운 공간을 지향한다”면서 “각각의 수요를 파악해 정신건강, 부모 교육 프로그램 등을 실시한다”고 말했다. 휴스턴 | 박하얀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청소년 성소수자 ‘원스톱’ 지원이 가능하다면


‘해치 유스(Hatch Youth)’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에게 임시주거를 제공하고 전화 상담, 정신건강 프로그램, 취업 지원, 성소수자 부모 교육 등을 원스톱으로 제공한다. 민간단체이지만 정부로부터 일부 자금을 지원받는다.

“혐오세력이 찾아올 때가 있어요. 폭력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모든 곳에 안전장치를 뒀어요.” 휴스턴 몬트로즈 센터에서 만난 대외협력 매니저 켄트 로프틴은 청소년 성소수자를 지원하는 공간이 미로처럼 설계됐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단체에 따르면 청소년 성소수자의 25%가량이 18세 시점에 홈리스 상태가 된다. 단체는 홈리스 성소수자 청년들(18~24세)에게 18개월간 주거를 제공하고, 개별 상황에 따라 체류 기간을 연장한다. 로프틴은 “신속한 주거 제공이 중요하다”면서 “단체 소유 아파트에 혼자 또는 2~3명이 함께 거주하도록 한다”고 했다.

경향신문

해치 유스 활동가 젠 브록(왼쪽)과 몬트로즈 센터 대외협력 매니저 켄트 로프틴이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처한 상황과 단체의 지원 등을 설명하고 있다. 휴스턴 | 박하얀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경향신문

단체 해치 유스에서 성 정체성 및 성적 지향을 나타내는 상징 깃발들을 나열한 안내문. 휴스턴 | 박하얀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8세 이하 홈리스 성소수자 청소년은 주법에 따라 정해진 쉼터에 입소해야 한다. 단체는 쉼터 종사자들을 교육해 성소수자 친화적인 환경 조성을 돕는다. 해치 유스 활동가 제니퍼 브록은 “어젯밤에 8살 되는 아이가 자신의 젠더 정체성 때문에 집에서 쫓겨났다며 이곳을 찾아와서 아이가 머물 수 있는 곳을 찾아주었다”면서 “부모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녀의 젠더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돕는 부모교육 프로그램도 확대하고 있다”고 했다.

자립에 필수적인 취업 지원도 해치의 역점사업 중 하나다. 취업교육 전문가와 함께 지원서 작성, 인터뷰 연습을 돕고 개인의 젠더 표현을 해치지 않는 복장도 지원한다. 브록은 “성소수자의 취업은 비성소수자보다 어렵지만, 다양한 젠더를 포용하는 고용주, 직원들과 오랜 시간에 걸쳐 관계를 다져 상황이 나아졌다”고 했다.

한국의 청소년 쉼터는 성소수자를 고려한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고 체류할 수 있는 기간도 짧다. 2021년 여성가족부 국정감사에서 탈가정 성소수자 청소년의 47%가 청소년 쉼터를 이용할 수 없었다고 응답한 조사결과가 공개됐다.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이 쉼터를 시범 운영하고 있지만 재원의 한계로 이틀가량 머무는 일시 쉼터에 머물러 있다.

경향신문

지난달 26일(현지시간) 휴스턴 공립 도서관에 전시된 ‘금지 도서’들. 보수 성향이 우세한 주를 중심으로 금서 지정이 계속되자 지역 서점 등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소송 제기, 캠페인 등 대항 운동이 진행 중이다. 휴스턴 | 박하얀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금서 요청’ 미국 1위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


도서관에서 성소수자 관련 서적을 퇴출시키는 등 문화 영역에서의 통제 강화 시도와 이에 대한 저항도 벌어지고 있다. 텍사스는 지난해 미국 전역에서 ‘금서’ 지정 요청이 가장 많았던 주였다.

지난달 26일 방문한 휴스턴공립도서관에는 ‘금지된(Banned)’이라는 문구가 적힌 띠지를 두른 책들을 전시한 부스가 마련돼 있었다. 주정부가 금서로 지정한 책들을 모아둔 곳으로 주정부의 조치에 항의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국도서관협회의 ‘읽을 자유’ 캠페인을 홍보하는 책갈피도 비치됐다.

경향신문

지난달 26일(현지시간) 휴스턴 공립 도서관에 전시된 ‘금지 도서’들. 휴스턴 | 박하얀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도서관 직원 레지나는 “오, 책 한 권이 없어졌어요. 누가 빌려갔나봐요!”라면서 환호했다. 그는 주정부가 동명이인 작가의 어린이책과 혼동해 금서를 잘못 지정한 일도 있었다면서 정부의 정책이 “어리석다”고 비판했다. 그는 “독립적으로 운영돼 온 학교들에서도 다양성 정책이 중단되는 등 주정부의 통제가 강해졌다”면서 “초등학교뿐 아니라 중학교에서도 금서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고 했다. 다른 직원 애런은 “우리는 도서관이 가능한 모두를 포용하기를 원한다”면서 “이런 책들을 공공 영역에 유지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어떤 사람이 와도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학도 위협받고 있다. 휴스턴대학 도서관은 성소수자 특별 컬렉션을 개설해 미국 남부 성소수자 역사를 담은 기록과 자료를 보전해왔다. 그런데 텍사스주는 트랜스젠더 여학생의 대학 스포츠 경기 참여와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프로그램을 제한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휴스턴대 DEI 센터와 성소수자 지원 센터가 최근 문을 닫았다.

경향신문

미국 텍사스 휴스턴대학 성소수자 특별 컬렉션이 보관하고 있는 미국 성소수자 역사에 대한 기록들. 과거 시니어 성소수자들의 모임에 대한 기록부터 부모에게 커밍아웃하는 방법을 위트있게 다룬 만화까지 다양한 자료가 보존돼 있다. 휴스턴 | 박하얀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컬렉션의 기록보관 담당자 조이스 가비올라는 “여러 책 가운데 특히 성소수자에 대한 책이 가장 많은 공격을 받고 있다”면서 “우리가 수집하고 보존해서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컬렉션 최고 책임자인 크리스티안 켈러는 “우리 대학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특히 공립초등학교가 영향을 많이 받는다. 현재 굉장히 어려운 환경이다”라면서 “학생들이 반대 시위를 벌이는 등 금서 움직임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정치적 투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서점 ‘로스트 시티 북스’ 2층에 성소수자 관련 도서들을 비치한 코너가 마련돼 있다. 젠더 이슈를 다룬 도서 몇권에는 서점 직원들이 손수 쓴 추천서가 붙어 있었다. 워싱턴 | 박하얀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휴스턴 | 박하얀 기자 white@kyunghyang.com

▶ 독립언론 경향신문을 응원하신다면 KHANUP!
▶ 나만의 뉴스레터 만들어 보고 싶다면 지금이 기회!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