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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목)

이슈 끊이지 않는 학교 폭력

어른들은, 제대로 알려 하지 않고 ‘경의선 키즈’에게 낙인부터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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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적 영상·기사로 소비된

‘경의선 키즈’를 만나다

일본 ‘애니’ 주인공 옷차림 10대들
정신 불안한 사람 지칭 일본 은어
‘지뢰계’를 공주풍 패션으로 수용

옷에 관한 취향 즐기면서 소속감
불안·소외감 공유…위로받기도
미디어 속 가출·성매매와는 거리
경찰도 “복장 외 다른 특징 없어”

하위문화 조롱 분위기가 문제 지적
되레 언론 소개 후 혐오·공격 심화
“싸잡아 문제인 것처럼 보도” 분노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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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부근 경의선 책거리에 ‘지뢰계’ 문화를 향유하는 10대 청소년들이 모여 있다. 이예슬 기자 brightpear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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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셋 하면 시작이야.” “영상에 귀엽게 나왔네.”

체감온도가 영하 1도로 떨어진 지난 11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 경의선 책거리의 4칸짜리 계단에 실크 원피스부터 레이스 리본이 달린 블라우스까지 ‘공주풍 복장’을 한 여성 청소년 12명이 모여 있었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 있는 이들은 일본 밴드 음악에 맞춰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며 점프하고 춤을 췄다. 계단에 휴대폰을 세워두고 찍은 안무 영상을 함께 확인한 이들은 “트친(트위터 친구) 하자”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주고받았다. 모였다가 흩어지길 반복하던 무리는 이날 오후 6시가 되자 35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에게 ‘경의선 키즈’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지난달 중순이다. 한 유튜버가 ‘홍대 지뢰계 가출 청소년의 삶’이란 제목의 영상을 공개했다. 경의선 책거리에 ‘지뢰계’ 복장을 한 가출 청소년들이 조건만남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영상이 공개된 지 일주일 만에 ‘30분 만남 35만원’이라는 영상 속 청소년 발언을 제목으로 단 자극적 온라인 기사가 쏟아졌다. 기사 내용은 일본 도쿄 번화가인 가부키초 옆에 모여 노숙하는 가출 청소년 ‘도요코 키즈’에 빗대 홍대에도 가출·성매매·자해로 얼룩진 ‘경의선 키즈’가 속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향신문이 직접 만난 이들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일대를 순찰하는 경찰도 영상과 기사가 다룬 가출·성매매는 드문 사례라고 말했다. 경향신문은 지난달 29일부터 3주에 걸쳐 20명의 청소년을 경의선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이들은 ‘불량 청소년’이라는 일각의 시선에 “낙인찍지 말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이곳에 모이는 이유를 설명했다.

경의선 키즈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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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에 모인 청소년들의 대표적 특징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듯한 옷차림이다. 대부분 화려한 블라우스와 검정 주름치마, 무릎까지 오는 양말과 높은 통굽 구두를 착용하고 있다. 이른바 ‘지뢰계’라 칭하는 옷차림이다. 지뢰계는 ‘정신이 불안정해 밟으면 터진다’는 의미로 귀여운 이미지와 달리 정신 상태가 불안한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발 은어다.

그러나 경의선의 지뢰계는 ‘비정상’과는 거리가 있다. 경의선의 아이들 대부분은 지뢰계를 ‘공주풍 옷차림’과 같은 의미로 인식했다. 중학생 김모양(13)은 “지뢰계는 원래 안 좋은 뜻이지만 우리는 그런 뜻으로 쓰지 않고 패션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한다”고 했다.

이들을 묶는 것은 예쁜 옷을 향한 관심이다. 리본이 달린 체크무늬 원피스를 입은 중학생 양모양(14)은 “추워도 친구들이랑 예쁜 옷을 입고 만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날 인천에서 온 중학생 A양은 “지뢰계 문화는 예쁜 패션”이라며 “블라우스를 좋아하다 이 문화를 알게 됐다. 도요코 키즈랑 엮어 전부 가출 청소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그냥 예쁜 옷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했다.

평일 하교 후나 주말에 이곳을 찾는 청소년들은 짧으면 20분, 길면 5시간 정도 경의선 책거리에 머문다. 계단에 앉아 친구를 기다리던 박모양(16)은 “근처 학원에 다녀서 학원이 끝나면 거의 매일 와서 틱톡을 찍고 친구와 수다를 떨다 집에 간다”고 했다.

경의선 일대 치안을 책임지는 경찰들은 경의선 키즈를 어떻게 볼까. 인근 지구대 소속 경찰 관계자는 “복장 외에는 일반 청소년과 다른 특징이 없다”며 “간혹 흡연·음주 단속차 순찰을 나가도 ‘틱톡 찍으려는 것’이라며 억울해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경의선은 취향·문화 공유의 장

경의선 키즈들은 옷에 관한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경의선 커뮤니티에서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낀다고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지뢰계 패션에 관심이 있었다는 중학생 김모양(15)은 “비슷한 옷을 입기 때문에 통하는 점이 있다”면서 “다른 곳에서는 이런 옷차림 문화 자체를 안 좋게 보는 시선이 있어 경의선으로 오게 된다”고 했다. 고등학생 정모양(18)은 “집 근처에 있으면 정말 다른 세상에 있는 기분인데 홍대에서 같이 있으면 그나마 시선을 덜 받는 기분”이라며 “부모님도 이전까지는 ‘그냥 공주옷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하셨는데 기사가 나간 뒤로는 걱정을 많이 하신다”고 했다.

홍대 일대에 애니메이션 굿즈 상점이 많고 코스프레 문화가 발달한 것도 이들이 경의선에 모이는 이유 중 하나다. 중학생 최모양(15)은 “홍대에 캐릭터용품 파는 AK몰도 있고 볼거리가 많아서 놀기 좋다”며 “춥더라도 밖에서 친구들 만나서 노는 느낌을 내고 싶다”고 했다.

SNS를 기반으로 같은 취향의 친구를 빠르게 사귈 수 있다는 점도 이곳의 특징이다. 이날 오전 11시30분쯤 경의선에서 틱톡 영상을 찍고 있던 중학생 황모양(14)은 처음 만난 또래들과 스스럼없이 닉네임과 나이를 물었다. 황양은 “지금 같이 있는 친구들도 다 처음 보는 것”이라며 “비슷한 친구들과 노래방도 가고 놀기도 한다”고 했다. 고등학생 장모양(16)은 “학교나 동네 친구는 계속 봐야 하는데 트위터에서 만나면 쉽게 헤어질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했다.

학교에선 어렵기만 한 친구 관계가 경의선에서 수월해지는 경우도 있다. 지난 2월부터 경의선을 찾는다는 고등학생 박모양(16)은 “학교에선 왕따인데 여기 오면 처음 보는 친구와도 편하게 지낼 수 있어 좋다”며 “이곳은 서로 돌봐주고 금방 친해지는 분위기”라고 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1990년대에는 청소년 문화에 펑크족이나 히피가 있었다면, 지금 경의선 일대 문화는 연성화된 종류로 볼 수 있다”며 “청소년들은 혼자 하기는 창피하니 본인 스타일대로 문화세력권을 형성한다. 이러한 청소년 문화공동체를 ‘생산적이지 못한 아이들’로 비난하는 기성세대는 늘 있었다”고 했다.

우울감 공유하는 도피처 되기도

경의선에는 ‘정신건강(Mental Health)이 좋지 않아 보이는 사람’을 칭하는 ‘멘헤라’ 문화도 공존한다. 멘헤라는 흔히 가정폭력·따돌림 등 과거의 상처가 자기파괴적 행동으로 이어지거나 타인의 애정을 갈구하는 특성을 일컫는다.

이곳에서 만난 청소년 중에서도 우울감을 드러낸 이들이 꽤 있었다. 이들은 오히려 경의선이란 공간이 ‘도피처’ 혹은 ‘자조모임’ 역할을 한다고 했다. 학교나 가정에 말 못할 우울감을 이곳에 모인 또래들에게는 털어놓는다는 것이다. 중학생 황양은 “공부 잘하는 학교에 다니는데 학교에선 공부 못하면 친구들이 무시한다. 하지만 여기는 그런 것이 없다”며 “여기에선 학교에서 느끼는 소외감을 알아주고 서로 공감해준다”고 했다. 박모양(14)은 “가정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 초등학교 때부터 우울 증세가 있었다”며 “이곳에선 좋지 않은 일을 나누기 좋다. 인터넷 친구라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보다 좀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다.

올해 초부터 관련 문화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대학생 천모씨(20)는 경의선 아이들 중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한다. 그는 우울감이 사고로 이어지는 것은 방지해야 하지만 경의선 키즈가 또래 집단으로서 갖는 의미도 분명하다고 했다.

천씨는 “멘헤라 문화를 향유하는 것은 불안한 심리를 표출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며 “정신과에서 자조모임을 하듯 경의선에도 비슷한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우울감을 빼놓고는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어려운데 경의선에 모여 ‘아프다, 불안하다’ 등 심리를 공유하고 동질감을 느끼면 우울감을 부정하기보다 인정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낙인 이후 노골적으로 커진 혐오

경향신문이 만난 청소년들은 공통적으로 “유튜브 영상과 기사 헤드라인이 전부 조건만남을 하는 것처럼 매도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중학생 김양은 “모 언론사와 인터뷰하며 ‘지뢰계가 다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는데 전부 싸잡아 문제인 것처럼 기사가 나가서 어이가 없었다”며 “유튜브와 언론 보도 이후 동네를 다닐 때 ‘쟤 요즘 지뢰계 하고 다닌다더라’ ‘요즘 몸 팔고 다닌다더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됐다”고 했다.

이들은 불량 청소년이라는 낙인이 찍힌 후 온·오프라인에서 더 큰 혐오와 범죄 위험에 노출되고 있었다. 중학생 신모양(15)은 “틱톡에 영상을 올리면 ‘파파카츠(성매매)하냐’는 댓글이 달리고 ‘이 정도면 몇만원 받아도 괜찮다’는 성희롱 댓글도 달렸다”며 “지나가던 사람들이 카광(유튜브) 영상 틀어서 보여주면서 지나간 적도 있다”고 했다.

경의선 광장에서도 이들을 향한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대학생 천씨는 지난달 성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경의선에 와 청소년들 앞에서 바지를 내렸다고 했다. 행인 2명이 아이들을 향해 ‘쟤네 다 성매매하는 애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날 오후 6시30분쯤 기자가 경의선을 방문했을 때도 한 남성이 다가와 “지뢰계들 친해지자”고 소리를 지르고 지나가거나 행인들이 ‘그 도요코 키즈들 아니냐’며 수군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천씨는 “이 문화 자체를 조롱하려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며 “이 문화를 향유하는 주체들이 청소년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을 ‘만만한 여자애들’로 보고 편하게 욕하거나 성희롱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청소년 하위문화 인정 필요

전문가들은 청소년의 주체성과 하위문화를 존중하지 않은 채 지뢰계·멘헤라 등을 ‘비정상’으로 낙인찍는 것이 문제를 키운다고 했다. 김찬 청소년인권행동 활동가는 “나이에 맞게 할 일이나 정상적인 놀이방법의 기준을 정해두고 여기서 벗어나면 비정상으로 몰아가는 것이 문제”라며 “청소년 사이에서 비주류적인 문화가 종종 생겨나는데, 문화가 발생한 원인은 생각하지 않고 이것이 위험한지 아닌지만 따지는 것은 청소년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청소년 인권단체 ‘지음’의 난다 활동가는 “청소년이 또래와 몰려다니는 것을 기본적으로 낮춰 보는 시선이 있다”며 “청소년을 차별적으로 인식하고 함부로 판단하는 것이 오히려 청소년을 위험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들은 조건만남 같은 일부 사례의 원인도 청소년이 아니라고 했다. 난다 활동가는 “조건만남은 청소년에게 성적 목적으로 접근하는 이들이 문제”라며 “청소년이 그 선택을 한 맥락을 따져보고 어떻게 사회가 개입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김송이·이예슬·최혜린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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