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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단독] “일단 만들어오면 돈 줄게”… 갑질 패션업체 수사 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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警, 업체 대표 고소장 접수

영세 12곳서 옷 받고 대금 미지급

특경가법 사기 혐의… 피해 17억

의류 원·부자재 회사는 부도 위기

“하도급 자본으로 덩치 키울 속셈”

공정위도 불공정 행위 칼 빼들어

경찰이 영세한 생산업체들로부터 제품을 납품받고도 수개월간 대금 지급을 미뤄온 패션 그룹 대표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패션·유통 업계에선 중대형 기업들이 영세한 하도급 업체를 상대로 하는 대금 미지급이나 판촉비용 전가 등의 ‘갑질행위’를 엄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10일 서울 수서경찰서는 미국의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의 국내 유통사로 알려진 M사 대표 권모씨에 대한 고소장을 최근 접수받고 수사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세계일보

10일 S브랜드사로부터 1억6000만원가량의 대금을 지급받지 못한 C업체의 생산 현장이 멈춰 있다. 대금 미납으로 자금이 묶인 C업체의 사무실은 4개월째 임대료가 연체됐고 한 명 있던 직원도 해고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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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따르면 권씨는 올해 초 새로 선보인 골프웨어 S브랜드의 제품을 납품받고도 지난 7월 첫 대금부터 지급하지 않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위반(사기) 등의 혐의로 고소됐다. 피해를 본 생산업체는 총 12곳으로 미납금은 총 17억원에 이른다. 경찰은 각 생산업체의 고소를 병합해 수사 중으로, 고소인과 권씨 등 관련자들을 순차적으로 불러 조사할 방침이다. 경찰 관계자는 “다수의 영세 자영자들이 피해를 본 상황이므로 신속하게 수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찰 등에 따르면 생산업체들은 모두 직원이 5명 이하 영세업체들로, 피해금은 업체별로 2000만원∼5억원대까지 다양하다. 워낙 규모가 작다 보니 수천만원 이상의 자금이 묶이면서 파산 위기에 놓인 업체들이 다수다. 의류 생산업체뿐 아니라 단추, 원단, 지퍼 등을 공급하는 원·부자재 업체들도 대금을 지급받지 못해 연쇄 부도 위기에 처했다. 5개월째 약 1억원의 대금을 지급받지 못한 A업체 대표는 “은행, 장기대출, 현금서비스 등 끌어쓸 수 있는 돈은 모두 끌어썼다”면서 “지인들에게 겨우 돈을 빌려 숨만 꼴딱꼴딱 쉬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대금의 절반이라도 받아 당장의 파산은 면하고 싶다”고 호소했다.

피해업체들은 첫 납품 대금부터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자본이 없는 상태에서 회사가 생산업체들에 ‘일단 만들고 기다려라’는 식으로 대응한 것을 ‘사기 갑질’로 규정하고 있다. 업체들에 따르면 M사는 항의가 이어지자 전체 대금의 5% 정도만 지불한 상태다. 5억원대의 피해를 본 B업체 대표는 “지난 6월 첫 납품 후 반년간 겨우 3200만원을 받았다”며 “30년간 의류 업계에서 일하면서 첫 결제도 안 해줄 정도로 자기자본 없이 브랜드를 론칭한 경우는 처음 본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피해업체 대표도 “처음부터 우리 같은 영세한 업체들 자본으로 브랜드 덩치를 키우려 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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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씨는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나는 문제 해결을 위해 그 사람들(피해업체들) 부도 안 나게 하려고 도와주고 있는 사람”이라며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매출도 줄었고, 투자가 해결되면 지급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납품액이 20억원 정도인 걸 알고 있고, 대금이 늦어지는 것도 공감한다”며 “지금까지 (S브랜드에) 들어간 돈이 18억원이다. 자기자본 없이 시작한 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기업들이 영세한 하도급 업체들에 손해를 떠안기는 불공정 행위들에 대해선 공정거래위원회도 주시하는 상황이다. 지난달 공정위에서 납품업체 7000곳을 조사해 발표한 ‘2023 유통분야 거래 관행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업체들이 경험한 불공정 행위는 대금 지연지급, 불이익 제공, 판촉비용 부당 전가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 공정위는 불공정 행위 경험 비율이 높은 업태나 행위 유형에 대해 감시를 강화하고, 필요시 직권조사로 시정할 방침이다.

글·사진=김나현 기자 lapiz@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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