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조은성 제작자 등 경위서 요구
수년 전 영화 촬영, 민간 교류까지 들여다봐
“통일부가 겁박” “블랙리스트 우려” 반발
접촉 신청해도 승인 안해···남북 교류 ‘봉쇄’
정부서울청사 내 통일부 모습. 이준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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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가 일본에서 영화를 제작한 문화예술인의 수년 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접촉 경위까지 파악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조총련이 친북 단체인 만큼 남북 교류·협력의 법과 질서를 확립한다는 취지다. 과거와 달리 교류·협력을 지원하기보단 과도하게 위축·봉쇄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12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통일부 남북관계관리단은 지난달 다큐멘터리 영화 <차별>의 김지운 감독과 다큐멘터리 영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의 조은성 제작자에게 “영화 제작 과정에서 조총련 관계자와 접촉했다면 접촉 경위를 제출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두 영화는 각각 일본 내 조선학교 차별 문제와 재일조선인들의 역사를 다뤘다.
시민단체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도 지난달 통일부로부터 “조선학교 방문 및 청년교류 등과 관련해 조총련 관계자와 접촉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접촉 경위서 제출을 요구받았다. ‘몽당연필’의 대표는 영화배우 권해효씨가 맡고 있다.
통일부에 따르면 김 감독과 조 제작자에 대한 경위서 제출 요구는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이 ‘반국가단체 옹호 영화’에 대한 영화진흥위원회의 국비 지원을 문제 삼으며 이뤄졌다. 이와 관련해 두 영화가 남북교류협력법상 북한 주민 사전접촉 승인을 받고 제작된 것이냐는 질의를 받자 통일부가 사실관계 확인에 나선 것이다. ‘몽당연필’에 대해선 홈페이지에 게재된 조선학교 측과의 교류 활동 내용을 파악해 요구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과거 교류협력법 적용이 다소 느슨하게 운영된 측면이 있었던 건 사실”이라며 “교류·협력을 원천적으로 막겠다기 보다는 법과 원칙에 따른 교류·협력 질서를 확립해나간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총련 접촉 경위와 관련해 문화예술계와 시민사회계를 대대적으로 조사하는 것은 아니며 문제 제기된 사안별로 위법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는 것이 통일부 입장이다.
윤미향 무소속 의원이 지난 9월 일본에서 조총련 주최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것과 관련해 통일부가 사전접촉 신고가 없었다고 문제 삼은 흐름의 연장선상으로 평가된다. 통일부는 남북관계 악화로 교류·협력이 중단된 상황에서 법과 질서 확립을 명분으로 남북 교류·협력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통일부의 조총련 접촉 경위 조사가 민간의 교류·협력 활동을 위축시킨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수년 전 접촉 여부까지 광범위하게 들여다보겠다는 상황이 우려를 키운다. 지난 3월 개봉한 영화 <차별>은 2017~2019년 촬영됐고, 2021년 개봉한 영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는 2016~2017년에 주로 촬영됐다고 한다. ‘몽당연필’은 2019년 교류 활동도 문제시된 것으로 전해졌다. 사전접촉 신고 위반에 따른 과태료 부과 시효는 5년이다.
김 감독은 기자와 통화에서 “통일부가 굳이 지금 와서 경위서를 내라며 겁박하는 느낌”이라며 “다음 작품으로 계획한 재일 동포 관련 동북아시아 디아스포라 촬영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조 제작자도 통화에서 “비슷한 분야에 있는 연출자와 제작자들의 활동이 위축될 것”이라며 “박근혜 정부 때 블랙리스트처럼 지원 배제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통일부에 북한 주민 사전접촉 신고를 해도 승인이 나지 않는 상황이라 관련 활동은 사실상 봉쇄돼있다. 지난 9월에는 6년여 만에 사전접촉 신고 승인이 한 건도 없었다. 통일부는 남북관계 악화를 이유로 필수적인 접촉 신고 건만 승인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전접촉 신고 자체도 줄고 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김상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이날 통일부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최근 접촉 신고 건수는 지난 9월 3건, 10월 4건, 11월 8건, 12월(11일 기준) 0건에 그쳤다.
통일부가 남북 교류·협력을 지원하는 본연의 역할에서 억제 기조로 급격하게 전환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김명준 ‘몽당연필’ 사무총장은 통화에서 “과거 통일부는 민간의 교류와 접촉을 보장해주려는 협력적 관계였다”며 “통일부가 이번처럼 교류와 관련해 먼저 연락해 겁을 준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조 제작자는 “남북교류협력법이라면서 교류를 방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재일조선인 문제의 특수성과 역사성을 간과하고 ‘반국가단체’라는 이념적 시각으로 접근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 사무총장에 따르면 일본 내 조선학교 학생의 80% 가량이 대한민국 국적이다.
김 감독은 통일부에 제출한 경위서에서 “대한민국도 조총련 특히 조선학교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야 된다”며 “조선학교를 단순히 북한을 지지하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매일매일 일상에서의 작은 통일이 일어나는 곳, 일본 사회에서 역사와 인권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는 곳, 나아가 동북아 평화의 마중물이 될 곳으로 인식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박광연 기자 lightyea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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