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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선거 결과에 절망한 이들에게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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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준우 녹색정의당 대표(왼쪽 셋째)가 2024년 4월10일 국회 개표상황실에서 출구조사 결과를 지켜보며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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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명백한 실패 앞에 속절없이 희망을 말하는 것은 현실도피에 불과하다. ‘긍정’의 이름으로 비판적 개입의 여지를 아예 차단해버리는 폭력이기도 하다. 어쩌면 잔인하게 반복되는 절망의 내막을 끝내 알아차리지 못하는 엘리트들의 태평한 낙관주의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최악의 선거 결과를 마주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결과를 들여다보며 진심으로 환호할 수 있었던 이들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 선거 이후로 내 주변 사람들은 대체로 우울하거나 예민하다. 심판론을 넘어선 비전 정치는 완전히 실종되고, 진보 세력이 살아남지도 새롭게 부상하지도 못한 선거. 그 어느 때보다도 저항과 변혁이 요구되는 시기에 오히려 초라한 실패만을 받아든 선거였기 때문이다.



각자의 절망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아래로부터의 변혁과 연대를 향한 믿음을 끝까지 배신하지 않고자 했던 이들의 낙담이 가장 클 것이다. 더 이상 뒤로 밀릴 수 없는 의제들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왔는데 이런 의제들은 현실 정치에서는 완전히 뒷전이다. 노동 문제는 누구의 문제도 아닌가? 기후정의는 뜬구름 잡는 소리였나? 페미니즘은 일단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안전하지?



하지만 우리는 정치가 필연적으로 절망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사회 운동과 제도권 정치의 양립 불가능성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선거는 이 간극을 매번 숫자로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바로 그 양립 불가능성을 뼈아프게 깨닫는 것에서부터 변혁은 다시 시작된다. 결국 진정한 변화는 사회 운동에서 온다는 점이 다시 한번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제도권 정치는 변혁도 정의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물론 법과 제도의 개혁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언제나 타협을 담보로 할 수밖에 없으므로, 누군가는 선택을 받고 누군가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그렇게 법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는 관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싶은 세계를 만들어가는 길고 복잡한 여정에서 법제 개혁은 그저 일부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 가열차게 운동의 동력을 복원하고 확장하는 일만이 남았다. 우리는 제도권 정치가 실현하지 못하는 가치를, 보란 듯이 실천해야 한다. 의제를 가다듬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항상 당사자를 중심에 둘 것, 우리 안의 위계를 철폐하고 평등과 존중을 의식적으로 실천할 것, 문제의 뿌리부터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할 것, 그리고 돌봄과 살림의 의무를 외면하지 않을 것. 그렇게 뚝심 있게 서로를 지탱하는 것이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을 지켜내는 길이다. 국가가 외면하는 자리에 사회 운동이 들어서고 아무런 비전이 없는 정치의 자리를 새로운 철학으로 채울 때, 바로 그 힘으로 낡은 세계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난다.



지금쯤 아마, “그래도 현실적으로 운동보다는 정치가 중요하지!”라고 반문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제도권 정치와 사회 운동이 그 기획과 실천에서 서로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것이 제법 현실적인 이상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제도권 정치가 변혁적 아이디어를 앞서 생산하거나 사회 운동을 향해 먼저 다가갈 리는 없으므로, 둘 사이의 실천적 거리를 좁혀내는 압력은 오직 사회 운동만이 만들 수 있다. 문제의 핵심에서부터 뛰어오를 때 생겨나는 강력한 추진력 말이다. 미국의 흑인 빈민이자 퀴어 페미니스트 모임인 ‘컴비 리버 컬렉티브’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닥의 위치성’에서 나오는 힘이다. 가장 뚜렷한 도약, 가장 강력한 추진력은 바닥에 발을 디딜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사회 변혁을 향한 가장 확실한 도약은 밑바닥에서 중층적 억압과 폭력을 몸으로 경험하는 당사자들과 함께할 때만 가능하다. 그들과 따로 놀면서 진보를 이룩할 수는 없다.



현대의 정치는 결코 바닥까지 도달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실 정치에서 오는 필연적 절망을 물리칠 힘은 사회 운동에 있다. 우리가 다시 희망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 희망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도 사회 운동과 함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빈민, 난민, 노동자, 이주민, 장애인, 퀴어/트랜스, 여성, 생존자/피해자의 곁을 절대 떠나지 않는 운동 말이다. 선거가 끝난 뒤 오래도록 부서진 마음을 안고 다 같이 사회 운동에 발을 들이자. 우리는 더더욱 분명하게 다른 길로 가자. 이 세계를 바꾸는 방법이 하나만은 아닐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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