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16 (일)

체르노빌 원전 폭발…출동 소방관의 비극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1979년 3월2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섬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방사능이 유출되었다. 주민 14만명이 대피했다. 사고가 터졌을 때 바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지만 주변 지역에 암환자가 늘었다는 주장이 있다.



소련은 1954년에 세계 최초로 원자력 발전을 성공시킨 나라. 1986년 초, 고르바초프는 “5년 안에 원자력 발전 설비를 2배 반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땅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특히 안전하다고 자부했다(우크라이나 이름으로는 초르노빌). 발전소 냉각수 연못에 물고기를 길렀다.



1986년 4월25일은 금요일이었다. 다음날부터 긴 연휴의 시작이었다. 소방팀 팀장 볼로디미르 프라비크는 당직을 서며 신혼의 아내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갓 태어난 딸을 데리고 연휴에 부모님 텃밭 일을 거들 계획이었다. 이날 밤, 체르노빌의 기술자들이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 테스트를 했다. 무리한 테스트 탓에 4월26일 새벽 1시23분에 원자로가 폭발. 프라비크는 신고를 받고 소방대원들과 함께 발전소로 달려갔다. 덮개가 날아간 원자로 지붕에 직접 올라가 불길과 싸웠다.



원자로 지붕에서 보낸 시간은 30분이 되지 않았다. 소방대원들은 몸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에 실려 갔다. 깜짝 놀라 달려온 가족을, 프라비크는 병원 창문 너머로 만났다. 갓 태어난 딸을 데리고 체르노빌에서 멀리 떠나라고 아내에게 당부. 소방대원들은 얼마 뒤 모스크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몸 상태는 더 나빠졌다. 프라비크는 스물네번째 생일을 앞둔 5월11일에 숨을 거두었다. 현장에 출동했던 다른 대원들도 목숨을 잃었다.



“원자로는 절대 안전하다고들 말하지 않았소?” 사고 소식을 들은 고르바초프의 반응. 체르노빌 사고로 고향을 등진 사람이 35만명 이상, 갑상샘암에 걸린 어린이가 수천명이었다.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날 이후 안전을 위해 업계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원자력 발전소도 이제는 안전해졌다고들 했다. 일본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난 2011년 3월11일까지는.



김태권 만화가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기획] 누구나 한번은 1인가구가 된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