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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호색한과 불능 청년, 나치 군용열차를 습격하다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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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체코 소설가 보후밀 흐라발(1914~1997). 1988년에 찍은 사진이다. 민음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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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들
보후밀 흐라발 지음, 송순섭·김경옥 옮김 l 민음사 l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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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후밀 흐라발(1914~1997). 낯설고 신비한 어감의 이름이다. 이런 이름을 지닌 작가라면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영국 왕을 모셨지’ 등 국내에 번역 소개된 그의 작품들은 독자의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는 전형적인 인물이나 플롯, 주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독특한 소설을 쓴다. 작가 경력의 대부분을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보냈으면서도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경직된 문학관에 갇히지 않은 작품 세계를 지녔다. 그 때문에 작가연맹에서 축출되고 출판 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지만, 밀란 쿤데라와는 달리 망명하지 않고 조국에 남아 체코어로 글쓰기를 계속했다.



‘이야기꾼들’은 2006년에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중편 분량 소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와 단편 다섯을 한데 묶은 책이다. 단편 가운데 ‘간이주점 ‘세계’’는 절판된 책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에 함께 실렸던 작품이고 나머지 네 단편 ‘이야기꾼들’ ‘장례식’ ‘이온토포레시스’ ‘다이아몬드 눈’은 국내 초역이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독일 국경에서 가까운 체코의 한 기차역을 배경으로 삼았다. 소설 속 인물들이 드레스덴 폭격의 폭음과 화염을 듣고 보는 장면이 묘사되는 것을 보면 1945년 2월로 짐작된다. “바로 올해, 그러니까 1945년 이미 독일은 우리 마을 하늘에 대한 제공권을 잃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의 앞부분에는 연합군 전투기의 총격을 받아 추락한 독일군 전투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추락한 전투기 날개의 금속판을 모조리 떼어내 토끼장이나 닭장의 지붕, 오토바이용 정강이 보호대로 만드는 모습에서 보듯 전쟁은 일상의 흥미로운 삽화 정도로나 묘사될 뿐이다.



주인공인 스물두 살 기차역 수습사원 밀로시 흐르마의 아버지 역시 독일군 비행기 잔해에서 나온 항공유 도관을 챙겨와 작게 잘라서는 샤프 연필을 만든다. 소설은 이어서 온갖 것을 만드는 손재주를 지닌데다 온 동네의 잡동사니와 기계 부품 따위를 주워다 집에 쌓아 놓고는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마다 부품을 찾아 건네곤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 아버지와 같은 연금 생활자였던 주정뱅이 증조할아버지 이야기를 거쳐 서커스단 최면술사였던 할아버지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 할아버지는 프라하로 진격해 오던 독일군 탱크를 홀몸으로 막아 선 채 “탱크를 돌려 돌아가라!”는 주문을 외우다가 궤도에 깔려 숨진 인물이다. 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 이야기와 다름없이 심상하게 소개된 할아버지의 죽음은 소설 말미에서 중요한 복선으로 다시 등장한다.



할아버지의 죽음에 이어서는 밀로시 자신이 석 달 전에 스스로 손목을 그었다는 이야기가 역시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소개된다. 그 일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던 그는 원래 일터였던 작은 기차역으로 복귀하고, 배차계장 후비치카와 역장 등 직장 동료들과 재회한다. 역에는 즈데니치카라는 젊은 여성 전신 기사가 함께 근무하고 있었는데, 밀로시가 병가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모종의 사건이 벌어져 기차역 안팎이 떠들썩한 상태다. 역장의 입으로 그 사건을 직접 들어 보자. “야간 근무 중이던 후비치카가 전신 기사인 즈데니치카를 엎어 놓고 치마를 걷어 올렸네. 그러고는 우리 역 직인을 그녀 엉덩이에다 찍었어. 하나 찍고 또 찍고, 또 찍고, 연달아 계속해서. 심지어 날짜를 찍는 도장까지!”



후비치카는 과거에 다른 역에서도 어떤 여성과 역장실에서 사랑을 나누다가 카우치의 방수포를 찢어 놓았던 전력이 있으며, 지엄한 백작부인이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훔쳐보며 “환상적인 엉덩이야. 죽여주는군!”이라 말할 정도로 호색적인 인물이다. 한편 소설이 진행되면서, 밀로시가 좋아하는 여성 마샤와 생애 첫 사랑을 나누려다가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실패했으며 손목을 그은 것이 그 때문이었음이 드러난다.



밀로시와 후비치카가 근무하는 곳이 작은 역이라고는 해도 이 역으로는 병력 수송 열차와 화물열차 등이 분주하게 지나다니고, 선로에는 유격대원들의 총탄 세례를 받고 부서진 열차가 서 있기도 하다. 열차가 연착했다는 이유로 독일군 친위대원들은 밀로시의 옆구리에 총부리를 들이대며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듯이 위협하는데, 밀로시 자신은 그들이 “그런 짓을 하기에는 너무 잘 생겼다”는 엉뚱한 생각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 사건이 후비치카에게는 모종의 결심을 부추겼고, 그것이 소설 말미의 영웅적 거사로 이어진다.



전쟁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는데도 소설은 전혀 무겁지 않고 엉뚱하며 유머러스한 필치로 서술된다. 즈데니치카가 후비치카와 벌칙 게임을 하느라 자발적으로 엉덩이에 도장을 찍게 한 것이고, 이 일에 관심을 지닌 영화사가 있어서 자신이 영화계에 진출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며 즈데니치카는 기대를 숨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문제의 도장에 독일어가 새겨져 있다는 이유로 “이건 명백히 독일어에 대한 명예훼손이야!”라 부르짖는 조사관의 흥분은 블랙코미디를 보는 느낌을 준다. 엉뚱하고 바보 같은 인물들이 출몰하며 비극과 희극이 교차하는 서술 방식은 함께 실린 단편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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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소설가 보후밀 흐라발(1914~1997). 1985년에 찍은 사진이다. 민음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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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라는 제목은 독일군 병력 수송 열차를 가리키고, 후비치카와 밀로시는 그 열차를 상대로 모종의 거사를 치른다. 그 과정에서 밀로시는 “독일군에게 살해당한 할아버지”의 존재를 뒤늦게 떠올리며 “사실 이미 오래전에 이런 생각을 했어야만 했다”고 자신을 탓한다. 독일군 병사와 밀로시가 서로에게 총을 쏜 끝에 손을 잡고 죽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반전 휴머니즘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한다.



“그 역시 한 인간이었다. 나처럼, 혹은 후비치카 씨처럼, 특별하게 잘난 것도 특별한 지위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를 쏘고 서로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만약 우리가 다른 곳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만났더라면, 서로 좋아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지도 모르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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