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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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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현봉 스님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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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20년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며 '송광사의 비원'이라고 부르는 선원 뒷산 오솔길을 안내한 현봉 스님. /김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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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총림 송광사의 최고 어른인 방장(方丈) 현봉(75) 스님이 1일 밤 입적했다. 송광사는 2일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남은당 현봉대종사께서 세연이 다 하시어 불기 2568(2024)년 5월 1일 (음 3월 23일) 오후 8시 전남 순천시 조계총림 송광사 삼일암에서 법랍 50년 세랍 75세로 원적하셨음을 알려드린다”고 밝혔다. 현봉 스님은 30일 오전 뇌출혈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9년 경남 사천 출신인 현봉 스님은 구산 스님을 은사로 1974년 송광사로 출가했다. 출가 초기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송광사 전통에 따라 주경야선(晝耕夜禪), 낮엔 농사 짓고 밤에 참선했다. 그는 “어른 스님들로부터 ‘현봉이가 심으면 고추, 감자, 호박이 많이 열린다’는 칭찬을 듣곤했다”며 “그때는 농사 안 짓고 참선만 하는 고참 스님들이 그렇게 부러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현봉 스님은 해인사·통도사·봉암사 등 전국의 선원(禪院)을 다니며 수 십 안거(安居·3개월 간의 집중 참선) 수행했다. 그는 선방(禪房)과 사찰에만 머물지 않고 불교계에서는 드물게 80년대말 만행(萬行)을 배낭여행으로 다녀온 ‘신식 스님’이기도 했다. 만 40세가 되던 1989년 그는 1년 동안 혼자 배낭을 매고 인도, 유럽, 이집트, 이스라엘로 만행(萬行)을 떠났다. 여러 종교와 문명의 발상지를 직접 답사하며 출가 초심을 되새기기 위해서였다. 그는 “당시 한 달 200달러 정도 예산으로 다니면서 ‘그동안 내가 선방(禪房)에서 안주하며 지냈구나’라는 것을 절감하고 수행과 포교에 대한 간절함을 재확인했다”고 말했다.

송광사 주지(2000~2003)를 비롯해 조계종 중앙종회의원과 호계원 재심호계위원을 지내는 등 이판(理判·수행)과 사판(事判·행정)을 겸비했다. 2019년 11월 송광사 방장에 추대됐고, 2021년 10월 조계종 최고 법계인 대종사에 올랐다.

방장에 오른 후에도 생활은 소탈했다. 방장 전용 승용차는 송광사 중진 스님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용차로 제공했으며 직접 전지 가위와 톱을 들고 틈날 때마다 경내를 다니며 꽃과 나무를 가꿨다. 작년 12월에는 현봉 스님이 인솔해 젊은 스님들과 함께 직접 키운 배추를 캐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너는 또다른 나’ ‘선(禪)에서 본 반야심경’ ‘솔바람 차 향기’ ‘일흔집(逸痕集)’ 등 경전 해설서와 저서를 펴낸 현봉 스님은 불교의 핵심을 쉽게 풀어 설명하는 법문으로도 이름 높았다. 2019년 11월 방장에 추대된 후에는 “송광사가 16 국사(國師)를 배출해 승보종찰(僧寶宗刹)이라고 불리지만 과거의 승보가 아니라 지금 스님 한 분 한 분이 모두 보물이 돼야 한다”며 스님들의 수행을 독려했다. 코로나 팬데믹에 대해서는 “코로나는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사태”라며 ‘자리이타(自利利他)’ 정신을 갖는 것이 절실하다”고 했다. 2020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선 “부처님은 ‘누구나 스스로 홀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러 세상에 오셨다”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두가 고통받던 당시 인터뷰에서 “어려운 때일수록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손발은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향소는 송광사 선호당에 마련됐으며 영결식은 5일 오후 2시 송광사에서 조계총림 총림장으로 열린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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