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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0 (목)

[모던 경성] ‘무도(舞蹈)의 시대’, 춤바람난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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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 속의 모던 경성]1920년대 전국서 舞蹈대회, 사교댄스 열풍

조선일보

방문은 떨어져나가고 창호지와 벽지까지 찢긴 허름한 방안에서 값비싼 축음기를 켜놓고 남녀가 사교춤을 추는 장면. 1930년대는 가정집까지 '무도의 광풍'이 몰아친 시대였다. 석영 안석주의 만문만화 '이꼴저꼴'3, 조선일보 1933년2월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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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6월2일 밤 8시,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무도회’가 열렸다. 개막전부터 열기가 뜨거웠다.1000명 가까운 관객이 몰렸기 때문이다. 출연진은 ‘예술학원’ 남녀학생 10여 명. ‘화려한 복장으로 나비같이 노니면서 여러가지 딴스를 하는 광경’은 ‘취할 듯 미칠 듯’ 관객을 사로잡았다. 댄스뿐 아니라 중간엔 성악과 기악 등 음악까지 곁들인 무도회였다.(‘성황으로 폐막, 연합무도음악회’, 조선일보 1923년 6월4일)

예술학원은 러시아 유학파 예술가 김동한이 운영하는 국내 첫 춤 전문학원이었다. 서대문동 2정목 7번지에 있던 이 학원은 원래 연극인 현철이 1920년 신극운동의 일환으로 세운 배우 양성소였다. 하지만 운영난으로 1년 만에 문을 닫았다가 1922년 8월 김동한이 인수, 음악부, 연극부, 무용부로 재출발했다. 김동한은 1922년 4월 ‘해삼위(블라디보스톡) 연예단’(4월18일~8월10일)과 내한했다가 국내에 계속 머물며 학원을 인수했다.

조선일보

1923년2월23일 조선통신사 주최로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노국(露國)피난민구제대무도연예회’ 광고. 러시아육군군악대 연주와 함께 무도, 기술(奇術·마술), 희극, ‘활계(滑稽)댄스’ 등이 올랐다. 러시아 혁명과 내전으로 발생한 피난민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열렸다. 매일신보 1923년2월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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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춤 전문학원 세운 김동한

당시 신문은 김동한을 피득(彼得 ·페테르부르크)대학 예술과를 졸업한 무용가로 소개했다.(동아일보 1923년 6월1일) 김동한의 ‘예술학원’은 1년만에 연구생이 100명에 달할 만큼 번창했다. 무용학자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1920년대 초반 서양 각국의 고급 사교댄스를 이 땅에 파급시킨 인물’로 김동한을 꼽는다.

무용학계에선 국내 신(新)무용의 출발을 1926년 3월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 漠)의 경성 공연으로 꼽는 의견이 우세하다. 하지만 그 전사(前史)가 엄연히 있다. 구한말 서양 외교사절을 중심으로 이미 ‘사교댄스’가 소개됐다. 1921년 4월 해삼위 학생음악단의 순회 공연은 우크라이나 전통 호팍춤을 비롯, 러시아, 스페인 민속춤을 선보이면서 조선 땅에 춤바람을 일으킨 기폭제가 됐다. 이듬해 4월 내한한 ‘해삼위연예단’은 무용을 본격적으로 선보였고, 연예단 일원인 김동한이 경성에 남아 무용을 가르칠 만큼 반응이 뜨거웠다.

김동한의 예술학원에 이어 일본과 중국에서 무용을 전공한 해외유학파 이병삼이 1925년 9월 낙원동에 ‘구미무도학관’를 개관,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병삼은 전해인 1924년9월 평양 수옥리에 먼저 구미무도학관을 세워 운영한 바 있다. 종로 기독교청년회관도 1925년 9월 무도과를 신설, 무용을 가르쳤다.

조선일보

용수철 위에 피아노와 의자, 아니 집 전체가 올라가 있다. 빠른 템포로 몸을 흔드는 찰스턴에 취한 세태를 풍자했다. 1920년대 미국에서 시작, 세계적으로 유행한 찰스턴 춤은 경성에서도 인기였다. 가정집까지 침투한 춤바람을 풍자한 안석주 만문만화. 조선일보 1930년11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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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해·기근 구제기금 마련 자선무도회

1920년대 초반 경성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무도대회가 열리고 댄스 강습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성기숙 교수가 당시 조선, 동아, 매일신보 등 일간지의 무도공연(1924년2월~1926년12월)보도를 정리한 결과에 따르면, 1924년 28회, 1925년 10회, 1926년 40회나 된다. 이시이 바쿠의 경성 공연 이전, 이미 무도열풍이 전국을 휩쓸고 있었던 셈이다.

무도대회는 단순히 공연을 즐기는 것만 아니라 다양한 공익 목적을 띠고 펼쳐졌다. 각종 수해, 기근 등 구제 기금마련은 물론 학교 기금 마련을 위한 사업으로 이뤄졌다. 1923년 8월10일 예술학원 주최로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서 열린 ‘관서(關西)수해구제 딴스와 음악대회’(‘수해구제의 연예’, 조선일보 1923년8월9일), 1923년 8월18일 인천 가부키좌에서 열린 ‘인천 굴업도 이재동포구제 음악무도대회’(‘인천의 음악무도대회’, 조선일보 1923년8월18일) 등이다.

◇러시아피난민 구제 무도회까지

1923년엔 러시아 혁명과 내전으로 발생한 피난민을 구제하기 위한 무도대회도 열렸다. 1923년2월23일 조선통신사 주최로 경성공회당에서 ‘노국(露國)피난민구제대무도연예회’가 열렸는데, 러시아육군군악대 연주와 함께 무도, 기술(奇術·마술), 희극, ‘활계(滑稽)댄스’ 등이 올랐다. 이 공연은 다음날인 24일부터 종로 단성사에서 계속됐다. (매일신보 1923년2월23일)

1925년7월3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서 열린 ‘대동학원 유지 음악무도대회’는 인력거 차부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설립한 대동학원 운영비 마련을 위한 목적이었다. 각 학교 학생들과 판소리 명창 이동백이 나섰다.

조선일보

요릿집에서 축음기를 틀어놓고 기생과 사교춤을 추는 모습을 꼬집은 안석주의 만문만화. 조선일보 1934년7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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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 ‘세계음악무도대회’

음악을 곁들인 무도대회 난립은 당시 음악가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홍난파는 1924년 음악회가 ‘최신(近日)유행품의 하나’라면서 ‘근래 경성의 악계에는 점점 음악회란 것이 상품화해간다’고 자조하는 듯한 글을 썼다.

‘어떤 회사의 경영에도 음악회, 어떤 강습소 경비보충에도 음악회, 무슨 회(會)에서도 음악회…강연회나 토론회가 고물(古物)이 되어가는 대신으로 걸핏하면 언필칭 음악회라 하니 그래 음악회란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고도 많은 장사에 무슨 장사를 못해서 음악회 장사를 하렵니까’(악단의 뒤에서, 동아일보 1924년7월7일)

홍난파는 종로 기독교청년회관(YMCA)에 들렀다가 우연히 그날 밤 여자강습원 주최로 열린 ‘세계음악무도대회’ 프로그램을 보고 경악했다. 자기와 아무 상의도 없이 출연자로 이름을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중국, 러시아, 조선 음악가들이 연합 출연한다고 광고한 이 공연은 난파가 보기에 ‘세계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음악과 무도만 출연’시켰다. 사교 댄스와 바이올린 연주를 같은 무대에 올려놓는 공연에 음악가들이 불만을 가졌을 법하다.

◇광란아들의 小천국

1930년대 춤바람은 공연장을 넘어 카페와 식당, 가정집까지 침투했다. 만문만화가 석영 안석주는 1930년을 회고하면서 ‘찰스턴’(Charleston)의 유행을 꼽았다. 1920년대 미국에서 시작, 세계적으로 유행한 사교댄스로 빠르고 경쾌한 리듬에 맞춰 추는 춤이다.

‘째즈-촬스톤-,1930년의 마지막 달이 가까워와도 촬스톤이 대 유행이다. 어느 남자가 어느 여자를 가리켜 말하되 ‘그 여자가 촬스톤을 곧잘 추던걸?’ 어느 여자 어느 남자를 가리켜 ‘그 이는 촬스톤을 아주 멋있게 추더군요…’ 얼굴의 선택, 육체미의 선택보다도 모던 걸, 모던 보이들은 이 ‘촬스톤’선수를 찾는다. ‘니그로’도 좋다. 아무라도 좋다. 촬스톤이 다 이리하야 1931년에는 흔들기 좋아하는 남녀들은 집을 ‘용수철’위에 짓고 용수철을 가구로 만들고서 ‘촬스턴’바람에 흔들다가 시들 모양-.이들의 눈에는 굶주린 헐벗고 떠는 사람이 보일 때도 ‘촬스톤’을 추는 것으로만 알게로군.’(’1931년이 오면 2′, 조선일보 1930년11월19일)

피아노와 의자, 아니 집 전체를 용수철 위에 올려놓고 춤추기에 여념없는 세태를 비꼬았다. 요릿집에서도 유성기를 마련해놓고 춤판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여봐요 뽀이상! 유성기 가져와요! 뿌르쓰(블루스)판하고 월쓰(왈츠)판하고….기생의 입안에서 껌이 죽겠다고 짹짹 소리를 내면 골아들어가는 척주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양키-의 ‘째즈쏭’이 지레 신은 기생의 버선발을 방바닥에 일으켜 세우면 기생의 껌 씹던 입에서는 혓바닥 장단이 시작되자 제각기 다투어 얼싸안고 춤을 추면 광란아(狂亂兒)들의 소(小)천국이 벌어진다.’(‘인력거 女神의 추잉껌꿈’, 조선일보 1934년 7월2일)

조선일보

1920년대 세계적으로 유행한 찰스턴 춤을 선전하는 포스터/Public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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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지, 방문 떨어진 집에서도 댄스

가정집까지 침투한 춤바람을 꼬집는 글도 실렸다. ‘화류병이 가정에까지 심지어 규수의 방에까지 침입하여 시집간지 사흘만에 코가 떨어지더니 지금에는 ‘딴스’가 가정으로 들어갔다. 2원 안짝이면 도배를 해서 방이 깨끗할 것을 아니하는 축들이 값비싼 축음기를 사다놓고 비단양말을 햇트리면서 춤을 춘다. ‘사나희여’여! 여자이면 알든 모르든 끼고도는 취미가 왜 그리 좋으냐. 인조견과 같이 유행될 이 ‘딴스’는 퇴치를 하여야할까? 장려를 하여야할까? 금주운동이 더 크니까!’(‘이꼴저꼴’, 조선일보 1933년2월18일)

방문은 떨어져나가고 창호지와 벽지까지 찢긴 허름한 방안에서 값비싼 축음기를 켜놓고 남녀가 사교춤을 추는 장면이다. 안석주는 이 빈한한 살림에 어울리지 않은 꼬락서니라며 댄스를 맹공격했다.

대일본 레코드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마담이자 영화배우 복혜숙, 동양극장 여배우 최선화 등 8명은 1937년 신년벽두 경무국장을 향해 ‘서울에 딴스홀을 허(許)하라’(‘삼천리’ 1937년1월호)는 공개질의서를 날렸다. 전쟁으로 치닫는 식민지 조선에 웬 생뚱맞은 일인가 싶기도 하다. ‘무도(舞蹈)의 광풍’은 그만큼 거셌다.

◇참고문헌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 삼천리 제9권제1호, 1937.1

성기숙, 근대 무도의 열풍, 긍정과 부정의 미학, 대한무용학회논문집 제46호, 2006,3

신명직, 모던 보이, 경성을 거닐다, 현실문화연구, 2003

유선영, 답례로서 연예: 1920년대 문화적 민족주의의 연예, 언론과 사회 22-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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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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