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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0 (목)

“삼체 맞먹는 돌풍 일으킬까”…하버드 출신 천재 SF작가의 소설 韓 상륙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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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랑전 / 켄 리우 지음 /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펴냄 / 1만8000원


매일경제

2017년 세계적인 SF문학상 휴고상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말하는 중국계 미국인 SF작가 켄 리우. [Henry Söderl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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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SF문학계의 유명 스타는 테드 창, 그렉 이건, 류츠신, 켄 리우다. 이들은 경계를 넘는 ‘미친’ 상상력으로 인류 표정을 묘사해 왔다. 넷 가운데 삶의 행적이 가장 복잡한 인물은 바로 켄 리우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엔지니어,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 변호사를 거친 켄 리우는 류츠신의 대작 ‘삼체’를 영어로 번역해 알리는 등 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공학자, 법률가, 작가, 번역가’라는 네 겹의 구조 안에서 천재 소설가의 작품은 이해받을 수 있다.

켄 리우가 2020년 출간했던 소설집 ‘The Hidden Girls and Other Stories’가 한국에도 ‘은랑전’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 전작 소설집 ‘종이 동물원’으로 문학계의 찬사를 받은 켄 리우는 이번에도 돌풍을 일으킬까.

신작에 수록된 13편의 SF단편은, 한 편 한 편의 깊이가 우주의 너비에 가닿는다. 그러나 허황되고 엉뚱한 공허의 몽상이 아니라 세계 정치와 외교, 역사의 비극을 소재로 끌어들여 충분히 현재적이다.

단연 압권인 작품은 ‘추모와 기도’다.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은 여대생 헤일리. 캘리포니아 음악축제에서 발생한 난데없는 총기 난사 때문이었다. 아버지 그레그, 엄마 애비게일, 동생 에밀리는 한없는 슬픔에 빠진다. 유족들은 이제 세상에 부재하는 딸과 언니의 사진과 영상을 보며 슬픔에 잠긴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찾아와 “헤일리를 온라인 공간에 복원 가능하다”는 제안을 한다. 사진, 비디오, 스캔자료, 드론영상, 녹음기록만 주면 마치 그녀가 살아 있는 것처럼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

엄마 애비게일은 자료를 건넨다. 그리고 얼마 후 헤일리의 영상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악성 댓글꾼이 등장해 “헤일리는 조회수 장사를 위해 매수된 연기자”라는 악플을 단다. 헤일리 추도를 위한 영상을 보고 사람들은 영상을 “날조 디지털 조작”으로 단언한다. 헤일리가 “총기 규제 음모에 가담한 연기자”이며 유족은 “조회수 장사꾼”이란 비난이었다.

참다 못한 아버지 그레그가 딸의 ‘시신 사진’까지 공개하지만 트롤러(분탕꾼)들은 멈출 줄은 모른다. 급기야 헤일리의 영상을 역겨운 포르노에 합성한 동영상이 유포된다.이처럼 소설 ‘추모와 기도’는 누군가의 고통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이를 빌미로 돈벌이를 하는 인터넷의 속성을 ‘이미지 자동 생성 기술’이란 소재로 예리하게 꼬집는다.

이번 단편집에서 압도적인 또 다른 단편이 있으니 바로 ‘비잔티움 엠퍼시움’이다. ‘고통의 상품화’란 심각한 주제로 연결되는 작품이다.

중심 인물은 탕젠원. 그는 ‘몰입 체험 슈트’를 통해 가상현실을 오감으로 감각하는 근미래에 사는 남성이다. 슈트를 착용하면 가상현실이 펼쳐진다. 눈 떠보니 포연(砲煙) 속에서 “뒤처지지 말고 잘 따라오라”는 아버지 고함이 들린다. 지금 탕젠원은 거주지를 탈출하는 난민 소년을 체험하는 것이다. 추가요금을 지불하면 총 맞은 어머니의 뒤통수에서 나는 피냄새까지도 재현되는 세상에 탕젠원은 살고 있다.

난민을 돕는 시민들의 기부금은 대개 자선단체나 기구를 통해 전달된다. 탕젠원은 가상현실 기술과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시켜 ‘기부자의 기부금이 난민에게 직접 전해지는’ 방식의 기부를 도모한다. 자선단체를 거치면 불필요한 원금이 소모되는데 ‘궁극의 공감 기계’를 사용하면 사람들은 자선단체가 아닌 ‘직접 기부’에 동참할 것이란 판단이었다. 이 소설의 제목 ‘엠퍼시움’은 탕젠원이 고안한 새 형태의 기부 문화를 뜻한다. 엠퍼시움 목적은 단 하나다.

“자선단체에게서 세계인의 연민 공급 통제권을 빼앗아라.”

특권층이 스스로 ‘더 나은 인간이라는 기분’을 누리고자 억압받는 고통을 착취하는 것이 아닌지를 이 소설은 묻는다.

영화화 판권이 이미 계약된 다른 수록작 ‘메시지’는 핵폐기물에 관한 이야기다. 중심인물 제임스 벨. 그는 행성 테라포밍 작업 중에 헤어진 아내의 호출을 받는다. 본인이 시한부이니 어린 딸 매기를 데려가라는 것. 딸과 함께 아서 에번스호를 타고 돌아가 작업중이던 제임스는, 2만 년 전 멸망한 고대문명이 남긴 문자를 보게 된다.

패망한 고대 문명이 남긴 메시지를 해독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임스는 행성에 남겨진 ‘92개 피라미드의 배열’에 주목한다. 그것은 분명히 원자 모형이었다. 판독 결과 그건 우라늄이었다. 지하에 묻힌 것들이 거대한 핵폐기물임을 외계인들이 남긴 것이다. 그때, 매기가 동굴 밑바닥에서 지름 50cm의 유리공을 들고 나온다. 그건 수천만 개 중 하나일 뿐이었다. 사랑하는 매기의 전신에서 열이 펄펄 끓기 시작한다.

치명적인 방사능에 노출된 매기와 제임스. 그런데 여기서 질문. 그들은 인간일까. 아니다. 외계인은 바로 우리 인간이며, 그들이 발견한 행성이야말로 ‘지구’는 아닐까.

켄 리우 소설은 SF소설이면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20세기와 21세기의 국제정치 문제가 반복 서술된다. 미국, 일본, 중국 등 거대 권력은 전부 비판 대상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양의 전통을 미학적으로 연결하는 마법사다. 그의 글쓰기에는 성역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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