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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 (목)

[기자가만난세상] ‘영어 남발’ 정부 보도자료 씁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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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weekly·주간회의) 시작할게요. 어디까지 얼라인(align·조정)됐어요?” “리소스(resource·자원) 파악 중인데 듀데이트(due date·마감일)까지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애자일(agile·빠른)하게 해볼게요.” “저는 배리에이션(variation·변화)을 주면서 가야 더 핏(fit·알맞은)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최근 유튜브에서 인기인 개그 영상에 나오는 장면이다. 출연진들은 “이슈(issue·문제)가 있습니다”란 말에 “스픽!(speak·말해봐요)”이라 대꾸하는 등 과도하게 영어를 사용해 웃음을 자아낸다.

세계일보

김유나 사회부 기자


마냥 웃고 넘길 수만 없는 것은, 영상이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어서다. 실제 영상 댓글 창에선 ‘현실 고증 잘했다’는 글이 눈에 띈다. 현실 사무실에서도 “제안서 디벨롭(develop·발전시키다)하고 장소 어레인지(arrange·확정)해주세요”, “3시까지 노티(notify·알리다)해주세요” 등 영어를 과하게 쓰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선 컨펌(confirm·승인), 인볼브(involve·참여하다), 리스트업(list up·목록화) 등의 영어단어를 ‘직장인 업무 용어’라고 소개하는 글도 찾을 수 있다. 영어를 쓰는 것이 격식을 차리는 ‘비즈니스 매너’라고 여기는 분위기다.

일상에서 영어를 절대 사용해선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말로 딱 떨어지지 않는 개념이나 우리말로는 의미가 온전히 살아나지 않는 경우 외래어는 ‘양념’이 될 수 있다. ‘블로그’를 ‘누리사랑방’으로 고쳐 써야 한다는 주장은 ‘뭘 그렇게까지’란 생각이 들지 않는가. 다만 리유저블컵(다회용컵)처럼 직역 의미 그대로인 영어 과잉 사용은 지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글 사용 흐름엔 정부가 앞장서야 하지만, 최근 정부 보도자료에서도 영어 남용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기자가 담당하는 교육부는 ‘디지털인프라담당관’, ‘교육데이터담당관’ 등 부서 이름 자체가 영어로 돼 있는 곳도 있어서 해당 과에서 나오는 자료에선 자연스럽게 ‘인프라’, ‘데이터’ 표현이 빈번하게 쓰인다. 자료의 데이터는 ‘자료·정보·통계’로, 인프라는 ‘환경·기반’으로 바꿔 써도 어색하지 않지만 구태여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자료에선 ‘추천(큐레이션)’, ‘기기 실험실(디바이스 테스트랩)’ 식으로 오히려 한글을 영어로 다시 설명하거나, ‘디지털 튜터’, ‘테크 매니저’ 등 아예 영어로 붙인 직함도 보인다. 이들을 ‘디지털 보조교사’, ‘기술 관리자’ 등으로 부르면 안 되는 걸까? 이쯤 되니 영어가 한글보다 멋지다고 생각하는 건지 궁금해진다.

19일 나온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보도자료도 마찬가지다. 자료에는 ‘결혼·출산·양육이 메리트(merit)가 되도록’, ‘초저출생 추세 반전 모멘텀’, ‘퍼블릭케어’ 등 영어 표현이 다수 사용됐다. ‘이점’, ‘전환 국면’, ‘공공 돌봄’으로 바꿔도 무리 없는 표현들이다.

서두에서 소개한 영상에서 영어를 섞어 쓰는 모습은 웃음을 주기 위한 ‘전략’이었다. 정부 자료도 국민에게 웃음을 주려는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영어 사용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정부 자료가 우스꽝스럽게 보여선 곤란하니 말이다.

김유나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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