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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김윤덕 칼럼] 6·25에 부르는 리차드 김의 ‘하와이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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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독립운동한 1세대, 전쟁서 ‘아버지 나라’ 지킨 2세

북·러 야합, 안보 위기에도 與는 채 상병·김건희 늪에 빠져 국정 동력 잃고 권력 쟁투 중

野는 이재명 일극 체제 위해 민주주의 파괴… 이게 나라인가

조선일보

한국전에서 전사한 찬제 김 주니어 일병의 가족사진. 뒷줄 왼쪽에서 둘째가 리차드 김, 셋째가 찬제 김 주니어 일병이고, 아랫줄 왼쪽에서 첫째가 아버지 김찬제다.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사연구소 소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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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김은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 2세다. 그에겐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었다. 워싱턴주립대를 다니다 군에 입대한 뒤 일본으로 파병 간, 찬제 김 주니어 일병이다.

동생이 마지막 소식을 전한 건, 1950년 7월이다. ‘4시간 뒤 규슈를 출발하는 군함을 타고 전쟁 중인 한국으로 들어간다’는 내용의 짧은 편지였다. 사세보 미군 기지에서 7월 1일에 쓴 이 손 편지는 일주일 뒤 하와이에 도착했지만 결국 ‘유서’가 됐다.

찬제 김 주니어는 6·25 발발 엿새 후 북한군 남하를 막으려 미국이 한반도에 파견한 미 34보병연대 소속이었다. 그러나 소련제 탱크를 밀고 진격해 오는 북한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퇴각을 거듭하던 미군은 대부분 사망했고, 찬제 주니어는 북한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가 전사했다. 스물한 살이었다.

리차드 김 가족사를 들려준 이는 하와이 한인 이민사를 연구해 온 이덕희 소장이다. 그는 채 상병 죽음을 둘러싸고 연일 정쟁(政爭) 중인 대한민국에 리차드 형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했다.

역사는 그들의 아버지 김찬제에게서 시작한다. 김찬제는 1902년 제물포항을 출발한 첫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에 온 이민 1세대다. 인천 내리교회 전도사였던 큰형 내외를 따라 하와이로 왔을 때 7살이었던 그는 이승만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한인 자녀 교육을 위해 이승만이 세운 한인기숙학교 3회 졸업생으로, 대학 졸업 후 건축 엔지니어로 일하며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리차드에 따르면 아버지 김찬제는 호놀룰루 운하, 호놀룰루 소각장, 진주만 인근의 건물 등 자신이 시공한 건축물을 자식들에게 보여주며 뿌듯해했는데, 그중 하와이 한인기독교회도 있었다.

이승만은 1938년 이 교회를 신축하면서 김찬제에게 광화문을 본뜬 문루를 세워달라고 주문했다. 이승만은 미국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은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민족 교회를 만들고 싶어 했고, 광화문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김찬제가 이를 늠름한 자태로 구현해 내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광복 후 이승만이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김찬제는 자선 활동을 펼치며 한인 사회를 이끌었다. 막내아들이 일본으로 파병 간 것도 부모의 영향이다. 파병지를 알래스카로 선택할 수 있었지만 아들은 “아버지 나라와 가까운 일본이 어떻겠냐”는 부모의 뜻을 받들었고 그곳에서 전사했다. 찬제 주니어처럼 한국전에 참전한 하와이 한인 2세 수백 명 중 전사하거나 실종된 군인은 15~18명. 이덕희 소장은 “하와이 이민 1세대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면, 2세들은 미군이 되어 부모의 나라에 참전하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실제로 하와이 KBFD TV가 제작한 다큐 ‘제복의 영웅’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한인 2세를 다룬다. 전쟁 막바지 해군 중령으로 참전한 알프레드 김은 이승만과 ‘동지회’ 활동을 한 김학성의 아들로, 북에 고립된 미군들을 구조하는 임무를 수행한 뒤 생환한다. 물김치와 물냉면을 특히 좋아한다는 구순의 노장이 서툰 발음으로 ‘아리랑’을 부르는 대목은 가슴 시리다.

리차드 김이 하와이 한국전 추모 공원을 찾은 대한민국 공군사관 생도들과 만나는 장면도 뭉클하다. “나도 해군 상병이었다”는 그는 “한국전에서 전사한 내 동생을 기리고, 대한민국을 기리기 위해 여러분에게 경례를 하고 싶다”며 70년 전 동생의 나이였을 20대 생도들에게 오른손을 들어 경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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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호놀룰루 한국전 추모공원에서 대한민국 공군사관생도들을 만난 리차드 김이 젊은이들에게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 . /하와이 KBFD TV '제복의 영웅'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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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나라에 대한 하와이 한인들의 사랑과 헌신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이덕희 소장은 “하와이 전체 인구의 2%를 넘어본 적 없는 한인 사회는 나라를 잃었던 민족인 만큼 유대와 결속력이 단단했다”며 “사탕수수 농장서 일해 번 돈을 독립 자금으로 내놨던 1세대의 애국심이 2~3세로 대물림돼 왔다”고 했다.

하와이 한인 사회가 요즘 대한민국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핵으로 무장한 북한과 러시아의 독재자가 포옹하며 전 세계 안보 지형을 흔들고 있는데도 대통령과 여당은 채 상병·김건희 늪에 빠져 국정 운영의 동력을 잃은 지 오래고, 야당은 이재명 일극 체제를 위해 사법과 언론을 협박하며 민주주의를 뿌리째 흔드는 중이다. 북한이 연일 오물 풍선을 날리고 군사분계선을 수차례 침범해도 국회 국방위원회, 외교통일위원회는 구성조차 되지 않았으니, 이게 나라인가.

하와이 시각으로 6월 25일 오후 1시 펀치볼 국립묘지에서는 리차드 김의 안장식이 열렸다. 동생의 유해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한국전 참전 용사 추모비를 자비로 건립해 온 그는, 아버지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동생을, 74년 전 실종된 일개 일병의 유해를 찾기 위해 지금도 모든 노력을 쏟아붓고 있는 미국을 자랑스러워하며 지난 달 눈을 감았다고 한다. “국방에서나 경제에서나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자”는 이승만의 유언을 실현하려면 이런 국민, 이런 국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김윤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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