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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나~는 행복합니다” 야구 빼고 다 1등하는 야구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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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예능·유튜브·굿즈 최강자

장외에서 잘 나가는 한화

배우 조인성은 서울 태생이지만, 대전 연고 야구팀 한화 이글스 30년 골수팬이다. “이모부가 직장(당시 한화에너지)에서 받아 주신 어린이 회원 선물로 응원을 시작한 게 여기까지 왔네요.” 고난의 행군이었다. “보다가 잠깐 졸다 깨면 역전당해서 지고 있고…. 10대 0으로 이기고 있어도 저는 긴장을 놓지 않아요. 10대 11로 질 수 있기 때문에.” 한화 팬답게 그는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다음 우승요? 길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이번 생에….”

너무 아프면 나중엔 웃음이 나온다. 초월한 것이다. 9·10·10·10·9.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배우 인교진이 대답한다. “한화 순위잖아.” 차태현이 거든다. “최근 순위 얘기하는 거야?” 한화 이글스의 지난 5년간 성적표. 참고로 국내 프로야구팀은 10팀이다. 그래도 목놓아 응원한다. TV 예능까지 탄생했다. 조인성을 비롯해 차태현·인교진·이장원 등 연예계 한화 팬을 내세운 ENA ‘찐팬구역’. 특정 프로 구단 팬을 조명한 예능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화 팬, 주인공이 되다

녹화장에서 한화 경기 중계를 실시간으로 보며 일희일비하는, 다소 맹목적인 호들갑. 본디 응원 자체에 예능적 요소가 다분하기는 하다. 그런데 왜 하필 한화인가? 지는 게 더 익숙한 이들, 속은 문드러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근본은 특정 팀이나 기업이 아닌 ‘언더독’에 있다”며 “오늘 꼴찌가 내일의 일등이 되지 말라는 법 없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전할 것”이라고 했다. “이글스 야구를 오래 보면서 감정 기복을 이겨낸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웠다”(가수 이장원)는 고백처럼, 응원은 일종의 수련. 방영 첫 회부터 한화는 (또) 패배를 기록했다.

18연패 와중에도 “나는 행복합니다”(응원곡)를 부르짖는 한화 팬들, 충청도 스타일의 외유내강 혹은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밈(meme)으로 자리 잡았다. 빅테이터 분석 서비스 랭키파이가 지난 4월 발표한 ‘KBO 리그 팀 트렌드 지수’ 1위는 한화 이글스. 키워드 검색량으로 산출한 인기, 연령별 선호도가 20대(36%), 30대(24%) 순으로 높았다. 젊은 세대에서 호감도가 크다는 방증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난관을 비관하지 않는 ‘원영적 사고’(아이돌 가수 장원영이 주창한 긍정적 가치관)가 최근 MZ세대의 유행으로 확산한 영향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한화 팬’은 드라마에서도 차용하는 소재가 됐다. 웹드라마 ‘개미가 타고 있어요’ 주인공이 여자친구 부모님 댁에 찾아간다. 떨떠름한 예비 장인. 집안에 놓인 야구공을 본 주인공이 승부수를 던진다. “야구 좋아하세요? 전 한화 이글스 팬입니다.” “점수 따려고 하는 말이쥬? 한화 누구 좋아하는디유?” “정민철 선수를 제일 좋아합니다. MVP나 골든글러브는 한 번도 못 받았지만 직구는 최고잖아요.” “그렇지.” “그리고 정민철 선수가 했던 말이 제 맘에 와닿아서요. 한화는 날 있게 해준 기반이다. 다이빙으로 치면 도약대고, 육상으로 치면 스타트 지지대같은, 내 삶을 지켜준 발판이었다. 제게는 미서씨가 그렇습니다.” 단박에 합격. “자네, 술 혀?”

◇부진해도 인기 폭발… 협업 1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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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프로 구단을 콘셉트로 한 최초의 편의점 ‘GS25×한화 이글스’ 1호점. 실내도 야구장 구조를 본떠 꾸며놨다. /GS리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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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한 팬덤은 ‘한화 이글스 편의점’까지 이끌었다. 지난달 대전에 들어선 ‘GS25×한화 이글스’ 1호점. 특정 프로 구단을 콘셉트로 한 최초의 편의점이다. 바닥부터 야구장 그라운드처럼 꾸미고, 관중석을 본뜬 12석 규모의 시식 테이블과 각종 굿즈로 채운 매장. GS리테일 관계자는 “성적과 관계없이 탄탄한 팬층으로 유명한 팀 아니냐”며 “충청권 민심을 적극 공략할 수 있는 선택지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장외(場外)에서 더 잘나간다. 한화 이글스는 굿즈 및 식음 사업 등으로 지난해 구단 역대 최고 매출을 올렸다. 상승세는 계속된다. 중고거래앱 번개장터가 지난달 발표한 분석 자료에 따르면, 야구 열풍을 증명하듯 지난 4월 야구 관련 상품 거래액·건수 모두 전년 대비 2배 늘었는데, 구단별 검색량 1위는 한화 이글스 차지였다. 전년 동기 대비 381% 뛰었다. 번개장터 측은 “돌아온 ‘괴물’ 류현진의 화제성도 한몫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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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 회사와의 컬래버레이션도 활발하다. 최근 GS리테일과 협업해 내놓은 아이스크림 '잘한다 우쭈쭈바', CJ제일제당 '이글이글 불꽃 왕교자', 풀무원 '포기하지 마라탕면'(왼쪽부터 시계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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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하려면 먹어야 한다. 2019년 풀무원식품은 한화 이글스와 협업해 ‘포기하지 마라탕면’을 한정 출시했다. 끊을 수 없는 야구의 맛, 준비 물량(2만8000봉지)이 4일 만에 소진돼 앙코르 판매에 들어갈 정도로 흥행했다. 경기는 속 터져도, 만두는 안 된다. CJ제일제당이 이듬해 한화와 손잡고 ‘이글이글 불꽃 왕교자’를 내놓은 이유다. 재미를 노린 맛. 최근엔 GS리테일이 ‘이번 경기 팝콘각’(스낵), ‘잘한다 우쭈쭈바’(빙과) 등으로 먹거리 타율 경쟁에 뛰어들었다.

◇최초 OTT 다큐에, 유튜브 구독자 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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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한화 이글스: 클럽 하우스’의 한 장면. 수베로 감독의 한탄은 팀 성적에 황당해하는 게 비단 팬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운다(위). 그래도 응원 의지를 잃지 않는 뚝심의 한화 팬(아래). /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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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한화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다인 18연패를 기록했다. 이듬해 구단은 대대적 팀 리빌딩을 추진했고, 시즌 전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기로 했다. OTT 회사 왓챠가 합류했다. “이야깃거리가 많은 팀”이기 때문이었다. 국내 OTT 최초의 야구 다큐멘터리, ‘한화 이글스: 클럽 하우스’(2022)가 나왔다. “프로 리그에서 어떻게 볼넷이 14개 나오느냐”며 한숨 쉬는 감독, 몸이 맘대로 안 되자 눈물 짓는 선수들의 짠내까지 내밀히 담아낸 다큐는 ‘야구판 미생’으로 불리며 인기 몰이를 했다. 한경수 PD는 “40년간 기아 타이거즈 팬이었는데 촬영 몇 달 만에 한화 팬으로 변절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해 한화는 꼴찌를 했고, 이듬해에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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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최초로 유튜브 구독자 30만명을 돌파한 한화 이글스 '이글스TV'.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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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는 독보적 최강자다. 공식 유튜브 계정 ‘이글스TV’는 KBO 구단 최초로 구독자 30만명을 돌파했다. 그라운드 안팎의 이모저모를 담아내는 친근한 시도가 팬덤 확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싱어송 히터 노시환입니다.” 이를테면 간판급 타자·투수를 추려, 요새 잘나가는 가수만 찍는다는 라이브 가창쇼 ‘딩고 킬링보이스’에 출연시키는 파격까지. 구단 관계자는 “이전까지는 단순 팬 서비스 차원이었다면 이제는 새로운 수익 창구가 됐다”며 “조회수 수익으로 1년 팀 운영비를 충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한 한화 팬이 이런 댓글을 달아놨다. “매년 말하지만, 진짜 이제 야구만 잘하면 된다.”

◇‘세상에 없던 말’ 창제한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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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가 주도한 야구 수어 캠페인 '세상에 없던 말' 영상. /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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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 프로야구는 1000만 관객 돌파가 유력시된다. 한화 이글스는 최다인 ‘매진 30회’를 기록, 압도적 티켓 파워를 자랑하고 있다. 국민적 여가, 그러나 모두가 누리는 건 아니다. 약 30만명의 농인(聾人)들에게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했다. 바로 ‘야구 수어(手語)’다. 한화 측은 “야구단만이 할 수 있는 사회공헌”을 기획했다. 야구 시청에 필수적인 국내 수어 135개를 선정, 수어 전문가와 함께 제작에 나섰다. 보크·밀어내기 등 경기 상황을 설명하는 사인부터, 커터·투심·체인지업·포크볼 등 구종(球種)까지.

일개 구단이 창제한 새로운 언어, 이 ‘세상에 없던 말’은 2018년 한국광고주협회 ‘국민이 선택한 좋은 광고상’ 대상(온라인 부문)을 받았다. 그해 한화는 11년 만의 포스트 시즌 진출과 더불어 정규 리그 3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전에 없던 인기 문법을 보여주고 있는 한화, 올해는 어떨까? 내년 창단 40주년을 맞는 유서 깊은 팀, 1999년 우승의 감격은 재현될 수 있을까? 현재 순위는 8위다.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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