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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8 (일)

한일, ‘사도광산’ 합의… “군함도와 달리 ‘약속’ 지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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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유산 등재’ 오늘 결정

조선일보

사도 광산 갱 내부 모습. /교도통신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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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의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두고 불거졌던 한국과 일본 정부의 갈등이 봉합될 전망이다. 일본이 사도광산 현지에 강제 노역에 동원됐던 조선인 노동자의 역사를 전시하고, 한국은 등재에 동의하는 방향으로 양국이 잠정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27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심의위원회(WHC) 회의에서 한국의 동의로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결정이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외교부 당국자는 26일 “어려운 과정 끝에 가까스로 한일 간 합의가 막판에 이뤄지고 있으며, 앞으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27일 회의에서 투표 대결 없이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하려면, 전체 역사를 반영해야한다’는 한국 입장을 일본 측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일본 아시히신문도 이날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지난달 사도광산에 대해 등재될 만한 가치가 있다면서도 ‘전체 역사를 반영할 필요성’ 등을 이유로 등재가 아닌 ‘정보 조회’(referral, 한국은 ‘보류’로 번역)를 권고했고 이후 한일 정부가 협의를 벌여왔다”고 보도했다.

WHC는 관례상 표결 없이 21개 위원국이 전원 의견 일치로 결정하는 컨센서스(전원동의) 방식으로 이뤄진다. 위원국인 한국이 반대 표명하면 전례가 없는 표결이 불가피하며 등재에는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가 필요하다. 27일 회의에선 사도광산을 포함한 신규 등재 안건 28건이 다뤄질 예정이다.

한국 입장에서도 끝까지 반대해 표결로 가는 데는 부담이 적지 않았다. WHC는 대다수 회원국이 자국 유산의 등재를 원하기 때문에 표결보다는 교섭과 타협으로 이견을 좁히고 합의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일본이 유네스코의 주요 지원국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이 표결을 고수하는 건 외교적 부담이 상당한 일이다. 현재 양국은 ‘조선인 노동의 강제성’에 대한 표현 문구를 두고 막판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2021년 12월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추천 후보로 선정하고 등재를 추진하면서 이 문제가 한일 간 외교 문제로 떠올랐다. 일본이 당초 “17세기 세계 최대 규모의 금 생산지였던 사도광산을 세계에 알리겠다”며 등재 대상 기간을 에도시대(1603~1868년)로 한정하면서 조선인 1000여 명의 강제 노역이 이뤄진 일제강점기 이후를 배제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1939년 이후 1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전쟁 물자 확보를 위해 강제 노역했다. 이 때문에 사도광산 역사에서 스스로 치부라고 여기는 조선인 강제노역 역사를 일부러 숨기려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추진 사실이 알려진 직후 즉시 철회를 촉구하며 강하게 반발했고, 이후에도 “전시 강제노역의 아픈 역사를 포함한 전체 역사가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외교부 당국자는 사도광산의 등재에 동의하는 이유에 대해 “첫째로 일본이 ‘전체 역사’를 반영하겠다고 약속했고, 둘째로 이를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이미 취했다”며 “(조선인 강제노역 역사를 어떻게 반영할지) 이행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 합의하고 실질적인 조치를 이끌어냈다”고 말했다.

일본 내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놓고 양국이 갈등을 빚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일본은 2015년 하시마(端島·일명 군함도) 탄광 등 근대산업시설 23곳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이때도 한국은 “조선인 강제노역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함께 알려야 한다”고 요구해 일본 측으로부터 반영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일본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한국은 2020년 6월 유네스코에 이들 문화유산의 지정 취소를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하겠다고 밝히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이후 일본은 조선인 등 하시마 탄광 사상자 관련 전시 공간을 신설하는 등의 일부 추가 조치를 취했지만 충분한 수준이라고 보기 어려웠고, 일본이 뒤통수를 때렸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군함도’에서 벌어졌던 이런 상황이 ‘사도광산’에서는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외교부 측 입장이다. 이번엔 사전에 모종의 조치를 취한 뒤, 이를 전제로 등재에 동의했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다만 한일 교섭이 비공개로 진행돼, 외교부가 구체적인 내용을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에게 사전 설명하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군함도 상황이 재발되지 않도록 확실한 추가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사도광산

17세기 세계 최대 규모로 금을 생산했던 광산으로 니가타현 사도섬에 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기계화 시설이 도입됐고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태평양전쟁 때는 구리·철·아연 같은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 광산으로 활용됐다.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 이후 1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열악한 환경에서 구리·철·아연 등 전쟁 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강제 노역을 했던 곳이다. 한국은 이곳에 대한 일본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시도에 반발하면서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강제 노역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충분한 서술 없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돼선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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