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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수)

어떻게 기어갈 것인가 [김탁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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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오른쪽) 조국혁신당 대표가 지난 16일 10·16 재보궐선거 전남 곡성군수 재선거 박웅두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곡성군에서 월세살이하며 토란 수확을 돕고 있다. 조국혁신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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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 평전’을 읽다가 ‘바닥으로 기어라’라는 대목에 오래 머물렀다. 장일순은 하심(下心)을 놓쳐서는 안 된다면서, 할 수만 있다면 아래로 자꾸 내려가야 한다고 권했다. 말년에 사용한 ‘장서각’(張鼠角)이란 호에는, 쥐뿔도 없는 사람이며 거지와도 같다는 뜻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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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 소설가



기는 사람 위에 뛰는 사람 있고,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 있다고 한다. 어디 가서 자기 자랑 함부로 말라고 충고할 때 흔히 쓰는 격언이다. 이 문장에는 기는 사람보다는 뛰는 사람이 낫고 뛰는 사람보다는 나는 사람이 낫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한상봉이 쓴 ‘장일순 평전’을 읽다가 ‘바닥으로 기어라’라는 대목에 오래 머물렀다. 장일순은 하심(下心)을 놓쳐서는 안 된다면서, 할 수만 있다면 아래로 자꾸 내려가야 한다고 권했다. 말년에 사용한 ‘장서각’(張鼠角)이란 호에는, 쥐뿔도 없는 사람이며 거지와도 같다는 뜻이 담겼다.



역사에서 만난 두 사람이 떠올랐다. 먼저 조선 후기 최고의 춤꾼인 거지 광대 달문이다. 영조 시절, 뛰어난 기예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모두 나눠주고 평생 거지로 떠돌며 살다 갔다. 당대에 얼마나 인기가 높았으면, 민란을 일으키려는 자들이 사람과 재물을 끌어모으기 위해 달문의 아들이나 친척이라는 거짓 주장을 폈을까. 달문은 금고에 돈을 많이 쌓아둔 사람 대신,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해 돈을 많이 쓴 사람을 부자로 여겼다.



또 한 사람은 정조 시절 ‘백화보’라는 책을 낸 화가 김덕형이다. 박제가는 이 책의 서(序)에서, 김덕형이 일과를 마치자마자 재빨리 화원(花園)으로 달려가며, 꽃 아래 자리를 마련하여 누운 채 꼼짝하지 않았노라고 적었다. 꽃 미치광이로 불릴 만큼 면밀히 관찰했기에 그처럼 뛰어난 책을 그려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제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새로운 상상을 덧붙였다. 땅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오래 꽃을 살핀 것은 분명히 기이한 일이지만, 박제가가 언급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김덕형은 그 꽃이 피기까지 화원을 기어다니면서 흙을 파고 꽃씨를 심고 거름을 주며 가꾸느라 무척 많은 시간을 썼다. 꽃 핀 화사함에는 말들이 많지만, 꽃이 피기 전이나 진 후 그 화원을 일군 이의 정성엔 눈을 두는 이가 적다.



뛰거나 나는 사람 앞에서 기어보라고 한다면, 누구나 굴욕스러울 것이다. 기지 않고 뛰며 더 나아가 나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으려 들 것이다. 팔다리를 땅에 대고 기더라도 패배의식에 젖지 않고 치욕을 느끼지 않을 때가 있다. 농사를 지을 때다.



4년 동안 밭농사를 배우며 기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허리만 굽힌다거나 쭈그리고 앉아 들일을 하려 했지만, 서툰 솜씨에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곧 밭을 기어다니며 풀을 뽑고 흙을 파고 씨와 모종을 심었다. 어슴새벽부터 성당의 아침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무릎과 팔꿈치와 콧등에 흙이 잔뜩 묻을 만큼 이랑과 고랑과 밭두렁을 기었지만, 참담하지도 않았고 부끄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작물에 싹이 트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고맙고 뿌듯했다.



장일순은 밥을 하늘이라 높인 해월 최시형의 가르침을 평생 품고 살았다. 바닥을 기어서 천리를 가리라는 마음도 농사를 근본으로 여긴 최시형의 뜻을 이어받은 것이다. 밑으로 기어 참된 삶을 만나고자 노력한 장일순의 삶을, 시인 김지하는 ‘말씀’이란 시에서 난초에 비겼다.



“비록 사람 자취 끊어진 헐벗은 산등성이/ 사철 그늘진 골짝에 엎드려 기며 살더라도/ 바위틈 산란 한 포기 품은 은은한 향기는/ 장바닥 뒷골목 시궁창 그려 하냥 설레노니/ 바람이 와 살랑거리거든 인색지 말고/ 먼 곳에라도 바람 따라 마저 그 향기 흩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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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오전 전남 곡성군 석곡면 논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오른쪽)와 조상래 곡성군수 재선거 후보가 콤바인을 몰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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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처럼 고요하던 곡성군이 군수 재선거로 뜻밖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정치인들이 여럿 내려와서 예비후보자들과 함께 읍은 물론이고 면의 마을들까지 다니고 있다. 군수라는 자리는 매우 막강하다. 도지사나 대통령도 부럽지 않다는 이야기가 농담만은 아니다. 군의 행정을 맡아보는 으뜸 직위인 군수는, 군림하려 들면 얼마든지 높아질 수 있고 스미려 하면 한없이 낮아질 수 있다. 이번에 나온 후보자들 모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군수가 되겠다고 주장한다. 2만7천명 군민들을 더 잘살게 만들겠다며 다양한 공약들도 제시한다. 다른 시군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누구는 이렇게 뛰어다니겠다고 하고 누구는 저렇게 날아다니겠다고 한다.



후보자들에게 묻고 싶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얼마나 어떻게 길 것인가. 섬진강과 대황강 맑은 물로 자란 농작물들이 여무는 가을이다. 새로 뽑힐 군수는 논밭의 흙을 보듬은 채 평생 들녘에서 일한 농부들의 마음을 소중하게 여겨야만 한다. 곡성의 낮고 그늘진 구석구석을 부지런히 기면서, 마을과 들판과 강산과 동식물을 아끼는 이가 군수로 일할 때가 무르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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