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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목)

불투명한 ‘빌라 관리비’ 문제…“법정까지 가게 만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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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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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동구의 한 빌라에 사는 ㄱ씨는 지난해 10월 빌라 관리인 선거에 입후보했다. 주민 동의 없이 관리비를 올리고 관리비 사용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 등 문제를 일으켜온 기존 관리인 ㄴ씨를 보다 못해 직접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11월로 예정됐던 선거 자체가 치러지지 않았다. 연임을 노리고 입후보한 ㄴ씨가 선거관리위원장을 자임하며 차일피일 선거를 미룬 탓이다. ㄴ씨는 지난해 말 정해진 임기를 마친 뒤에도 선거를 막고 월 1500만원 안팎이 되는 관리비를 운영하며 관리인 행세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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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씨의 황당한 행동만큼 갑갑했던 건 빌라 관리 문제를 대하는 행정 관청의 태도였다. ㄱ씨는 구청에 제재를 요청했지만, 구청 쪽은 “정식 관리인이 아닌 ㄴ씨를 상대로 개입할 법적 권한이 없다”며 움직이지 않았다. ㄴ씨가 실질적으로 관리인 권한을 행사하더라도, 현행 집합건물법상 적법하게 선임된 관리인에게만 행정관청이 감독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ㄱ씨는 한겨레에 “행정이 개입해주면 좋을 텐데 구청은 아무 역할도 안 했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속상함을 토로했다. 아파트와 달리 빌라는 여전히 국가 행정의 바깥, ‘사적 자치’에만 내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달은 순간이었다. ㄱ씨는 결국 ㄴ씨의 부당한 직무수행을 멈춰달라고 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빌라나 오피스텔 등은 공동주택관리법 적용을 받는 아파트(150세대 이상)와 달리 ‘집합건물의 소유와 관리에 관한 법률’(집합건물법)을 적용받는다. 문제는 상대적으로 허술한 관리 규정이다. 아파트는 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K-apt)을 통한 관리비 사용 내역 공개가 의무화된 반면, 빌라는 50세대 이상인 경우 관리인에게 매년 1회 이상 관리비 등 사무 보고 의무를 부여한 정도에 그친다. 관리비 횡령이나 공사 입찰가 부풀리기 등 회계 비리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며 2016년 아파트 관리를 위한 법과 지원 체계는 따로 만들어졌지만, 빌라 등 다른 집합건물 관련 제도는 제자리에 머문 결과다.



주민 간 갈등이나 관리비리 문제가 벌어졌을 때 지방자치단체의 중재 권한과 관심도 차이가 난다. 공동주택관리법은 관리비 문제는 물론 안전시설 관리나 층간 소음에 이르기까지, 아파트 생활 전반에서 지자체의 제재나 권고, 지원이 가능하다고 규정했다. 집합건물법은 지난해 9월 법 개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지자체의 관리인 감독권한을 담은 규정이 신설됐다. 그나마 관리 부정 등이 의심될 때는 지자체가 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개입할 권한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ㄱ씨가 겪은 일처럼, 법 개정 뒤에도 행정기관의 무관심은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 박수빈 서울시의원(더불어민주당, 강북4)에게 서울시가 제출한 자료를 보면, 개정 집합건물법 시행 뒤 지난 1년 동안 서울시 내 25개 구청에서 집합건물 관리인에게 내린 자료제출 명령은 총 14건, 과태료 부과는 1건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빌라 등 집합건물에도 관리 투명성 제고를 위한 행정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김영두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한국집합건물진흥원 이사장)는 “집합건물은 주거용부터 상업용까지 용도가 다양해 공동주택처럼 획일적 규율이 어렵지만, 사적 자치의 영역으로 남겨놓기엔 관리비 비리 등 문제도 적지 않다”며 “지자체에서 집합건물 관리지원센터를 만들어 입주민을 조직적으로 지원하는 등 행정 지원으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3일 서울동부지법 민사21부(재판장 김정민)는 ㄱ씨가 ㄴ씨를 상대로 낸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에서 “ㄴ씨가 의도적으로 선거를 회피한 채 관리인 임기를 사실상 연장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사정이 존재”한다며 ㄱ씨 손을 들어줬다. 씁쓸해하며 ㄱ씨가 말했다. “빌라 입주민끼리 벌어진 분쟁을 법원까지 끌고 가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너무 비효율적입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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