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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토)

[만물상] 제 국민을 가두는 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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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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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장벽은 4000여년 전 시리아에 세워진 160km 길이 ‘트레 롱 뮈르’다. 돌·모래로 쌓은 장벽으로 흔적만 남아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 아메넴헤트 1세와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장벽 건설 전문가였다. 중국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길이 2만km로 인류 최대 토목공사라 불렸다. 장벽은 당연히 외적 침입을 막는 방파제였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막아주지는 못했다.

▶21세 들어 장벽은 불법 이민·난민·테러 방지용으로 바뀌었다. 전 세계 장벽은 10여년 만에 20개에서 70개로 급증했다. 프랑스·오스트리아·헝가리·그리스·터키 등은 난민을 막으려 수백km에 걸쳐 4m 높이 철조망 장벽을 치고 있다. 사우디는 테러 단체 IS 유입을 막으려 총 2400km에 달하는 중동판 만리장성을 쌓고 레이더와 땅굴 감지 센서까지 설치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을 둘러싼 810km 장벽, 미국은 멕시코 국경에 1126km 장벽을 쌓았다.

▶드물지만 이 장벽이 자기 국민의 탈출을 막는 용도로 쓰이곤 했다. 로마가 영국 북부에 건설한 하드리아누스 장벽은 나중에 주민 탈출을 막고 세금을 징수하는 용도로 변질됐다. 만리장성도 나중에는 주민 이탈과 반란 방지 목적이 컸다고 한다. 프랑스는 1950년대 알제리 국경에 전기 철조망과 감시탑, 지뢰 등으로 ‘모리스 선’을 구축했다. 주민의 국경 탈출을 막은 것이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 국가들에 ‘철의 장막’을 쳤다. 국경 철조망·지뢰로 주민 이동과 외부 교류를 철저히 막았다. 동독은 1961년 서독으로의 주민 탈출을 막으려 베를린 장벽을 설치했다. 1991년 장벽 붕괴 전까지 이를 넘으려다 많은 동독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미얀마와 아프가니스탄도 주민 탈출을 막기 위해 국경을 봉쇄하고 있다.

▶외적 침입이 아니라 제 국민의 탈출을 막는 용도로 쌓는 장벽 중 사상 최악을 북한이 기록할 모양이다. 북한은 지금 1400km에 이르는 북·중 국경에 철조망을 치고 있다. 중국 측 2중 철조망과 감시 시스템까지 더하면 철통 장벽이다. 지뢰와 못을 심는다는 얘기도 있다. 248km 휴전선에도 콘트리트 방벽과 지뢰밭을 설치 중이다. 주민과 군인 탈북을 막으려 북한 전체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만리장성은 과부의 눈물에 씻겨 무너진다”고 했다. 로마인들은 “장벽 뒤에 숨는 자는 반드시 망한다”고 했다. 아무리 이중 삼중 장벽을 쳐도 모순 덩어리 체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배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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