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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토)

보수가 살고 싶다면 ‘정강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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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장부승의 海外事情]

중국 모택동의 위기 극복

보수 우파가 배울 세 가지

조선일보

1927년 장개석의 상해 정변으로 중국 공산당이 궤멸적 위기에 처하자, 모택동 등 지도자들은 정강산(井岡山)으로 숨어 들어 재기를 꾀한다. 현재도 중국 공산당은 정강산을 혁명의 요람이라 부르며 ‘정강산 정신’을 기리고 있다. 사진은 정강홍기(井岡紅旗) 조형물. /트립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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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4월 12일 중국 상해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당시 파죽지세로 북벌 중이던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이 갑자기 총부리를 공산당에게 돌린 것이다. 당시는 국공합작 중이었기에 공산당원은 곧 국민당원이었다. 장개석의 상해 입성을 예상하고 노동자 봉기로 호응코자 했던 공산당원들은 허를 찔렸다. 수천 명이 처형됐고, 전국적으로 공산당 조직의 약 80%가 붕괴됐다. 당시의 처참함은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의 소설 ‘인간조건(La Condition Humaine)’에 생생히 묘사돼 있다. 상해에서 체포된 공산당원들은 포승에 묶인 채 기차역 앞에 줄세워지고, 한 명씩 산 채로 기차 화통에 던져졌다.

당시 숙청의 칼날을 피해 몸을 숨긴 중국 공산당원 중에는 북경대 사서 출신, 서른네 살의 젊은 지식인 모택동이 있었다. 그가 몸을 숨긴 곳은 강서성(江西省)과 호남성(湖南省) 경계에 있는 정강산(井岡山)이었다. 모택동의 정강산 입산은 이후 중국 공산당 재건의 기반이 되는 강서(江西) 소비에트의 출발점이다.

제목에서는 보수의 출로를 얘기할 것처럼 하더니 웬 중국 공산당 얘기냐고 독자들이 의아해할지 모르겠다. 물론 좌파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과거 중국 공산당의 위기와 그 극복 과정에서 작금의 한국 보수 우파 세력이 배울 점이 있다.

1927년 장개석의 상해 정변 이후 복수를 다짐한 공산당은 같은 해 남창(南昌), 광주(廣州) 봉기 등 반격을 노리나 실패한다. 당시 중국 공산당의 주류는 이립삼(李立三), 박고(博古), 왕명(王明) 등 소련에서 공부한 유학파였다. 이들이 배워 온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르면 혁명의 지리적 기반은 도시, 계급적 기반은 노동자다. 그러니 대도시 노동자를 조직하여 폭동을 꾀하자는 것이다. 모택동은 주류 노선에 회의적이었다. 중국인 대부분은 농민이다. 농민을 우리 편으로 삼아야 장개석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 이것이 모택동의 생각이었다.

농민을 공산당 편으로 만들려면 공산주의가 그들에게 이득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그래서 정강산에서 모택동이 실시한 것이 토지개혁이었다.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과 유랑민들에게 균분하고, 거래를 금지했다. 실험은 성공했다. 모택동이 재건한 소비에트는 900만 인구를 포괄하는 규모로 확장된다.

공산당의 성공을 장개석이 좌시할 리 없다. 토벌이 시작됐고, 국민당의 압도적 화력에 밀려 공산당은 결국 1934년 10월 강서 소비에트를 버리고 대장정에 나선다. 이듬해 1월 귀주성 준의(遵義)에서 향후 노선 결정을 위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가 열린다. 여기서 모택동 중심의 비주류가 주류 소련 유학파에게 승리하고 당권을 잡는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제2차 국공합작(1937)과 국공내전(1945~49)을 거쳐 마침내 장개석을 몰아내고 중국 전역을 제패한다.

중국 공산당의 스토리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세 가지다. 첫째, 모택동은 교조주의를 배격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보다 현실이 중요하다. 교조에 얽매이면 현실에서 패배한다. 현재 한국의 보수 우파는 박정희식 국가주의 교조에 빠져 있다. 보수라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과 박정희를 일체화하는 경우가 많다. 박정희가 빈곤을 퇴치해 줘서 고마우니 박정희식 정치가 무조건 옳다는 것이다. 그러니 “계엄 좀 하면 어떠냐” “나라에서 의대 정원 정한다는데, 의사들이 웬 불만이냐”는 식의 잘못된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중시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설사 박정희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옛날 같은 권위주의 통치는 불가능하다.

둘째, 모택동은 당의 저변을 확대했다. 장개석에게 짓밟힌 후 산으로 숨어든 모택동과 그의 동지들은 자기들이 소수파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다수파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자신의 이념이 왜 국민들에게 좋은지 실력으로 보여주고 자꾸 우군을 넓혀 가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이와는 정반대 길을 걸었다. 대선에서 간발의 차로 이기고도 자기가 다수파라는 착각에 빠져 적군만 늘렸다. 엑스포 유치 실패로 헛발질을 세게 하더니 과학기술자를 적으로 돌리고, 다음은 의사, 급기야 채 상병 사건에 와서는 군인들마저 등을 돌리게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보수 우파가 이미 소수파로 전락했다는 점을 자각하고 실력을 다져 우군을 늘릴 생각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념적 유연성이 필요하다. 모택동은 1927년 자기들을 학살한 장개석과 10년 뒤 다시 손을 잡고 2차 국공합작에 나섰다. 세를 불리려면 철천지 원수와도 악수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반대로 오늘날 한국 보수 우파는 이념적 순수성에 골몰한다. 이준석·한동훈은 배신자이고, 이재명은 ‘악마’다. 오로지 ‘우리’만이 보수의 적자라는 것이다. 이념적 순수성 타령만 하지 정작 자신들이 소멸 위기에 처한 것은 모른다. “소멸할지언정 개방하지 않겠다”는 모 여대생들 주장과 뭐가 다른가?

세 가지 교훈을 실천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위기의식이다. 지금 당장 ‘정강산’으로 들어가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그런 각오 없이 교조주의적 고립주의와 이념적 순수성에만 집착한다면 보수 우파의 말로는 비참할 것이다. 상해에서 체포된 공산당원들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잊어선 안 된다.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국제관계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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